간직하고픈 기록

진랍풍토기

힉스_길메들 2013. 11. 1. 13:12

주달관과 진랍풍토기

 

진랍풍토기의 저자 주달관(周達觀)의 전기는 분명하지 않다. 설부 100권본이나 고금설해(古今設海)본 등을 보면 "진랍풍토기"라는 제목 아래에 "원나라 주달관이 지었다고 하고 있고, 주달관의 호는 초정일민(草庭?民)이며 영가(永歌)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다.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초야에서 늙는 민간인이라는 의미의 '초정일민'을 호로 썼다면 관료였던 적은 없음을 알 수 있다. 영가는 현재의 절강성 온주(溫州) 영가현에 해당한다.

 

"진랍풍토기" 처음에 나오는 '총서'에 따르면 원정(元貞)원년(1295) 6월,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진랍(眞臘, 캄보디아)으로 파견하는 사절(使節)의 명을 받고 이듬해 2월에 온주를 출발하여 7월에 진랍국의 수도 앙코르톰에 도착하였다. 다시 이듬해 대덕(大德) 원년(1297) 6월에 귀국길에 올라 8월에 영파(寧波)에 도착하였다.

온주는 원나라 조정에서 시박사(市舶司, 해상무역을 관리하는 관아)를 설치한 항구 중의 하나로서 동남아시아 방면과의 해상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사절단의 배도 온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런 온주 출신의 주달관은 "제번지(諸蕃志)"를 읽은 것으로 보아 해외 각국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동남아시아 사정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사절이 된 것은 그의 이런 지견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달관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원대의 학자 오구연(吾丘衍)의 죽소산방시집(竹素山房詩集) 권2에 “주달가(周達可)가 봉사(奉使)가 되어 진랍국에 갔다 와서 그 풍속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 이를 기려 시 3수를 짓는다”라는 제목으로 주달가의 책 내용을 감상하는 시가 실려 있다. 봉사가 되어 진랍국에 다녀오고 풍속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면 주달가가 바로 주달관이고 그 책이 바로 진랍풍토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달가는 주달관의 오기일 수도 있고 자(字)를 다르게 썼을 수도 있다.

오구연의 시 중 한 수에 “이역(異域)을 두루 다니며 풍속을 듣고 진기한 풍경을 보며 장년이 되었다”는 시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주달관이 진랍에 다녀온 1296년-1298년에는 장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장년은 대략 30세, 또는 3, 40대의 연령을 의미하므로 주달관이 태어난 해는 1260년 전후로 보인다.

한편 원대 임곤(林坤)의 성재잡기(誠齋雜記)에는 주달관이 서문을 쓰고 그 말미에 “병술년 가평(嘉平) 보름에 영가 주달관이 짓다”라고 적혀 있다. 병술년은 지원(至元) 23년(1286)이거나 지정(至正) 6년(1346)인데 지원 23년은 주달관의 나이가 20대여서 다른 사람의 저서에 서문을 써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국 정확한 날짜는 지정 6년 12월 15일이 된다. 따라서 적어도 1286년에는 주달관이 건재했던 것으로 보여 위에서 추산한 생년에서 계산하면 이 때는 80대가 되며 그 후 오래지 않아 별세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구연의 시 내용을 보면 진랍풍토기를 읽고 나서 쓴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묘지(墓誌)에는 지대(至大) 4년 납월(臘月) 갑오(甲午)일에 운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312년 2월 5일이다. 따라서 진랍풍토기가 지어진 때는 늦어도 1312년 초 이전이다. 그리고 1297년 8월에 귀국하여 캄보디아에서 머물면서 얻은 견문을 상세히 모으고 정리하였다고 생각하면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14세기 초를 전후하여 저술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진랍풍토기는 주달관이 약 1년 동안 캄보디아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말 캄보디아의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특히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화교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캄보디아가 번성하던 시기, 즉 앙코르 시대의 사료로는 비명이 있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기본적으로 궁정과 귀족층과 관련된 내용에 그쳐서 전반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내용에 그친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진랍풍토기에는 궁정과 귀족들의 모습에서부터 일반 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앙코르 시대에 대한 캄보디아 국내의 문헌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진랍풍토기는 유일한 자료로서 귀중하다. 캄보디아와 관련하여 이 책 전후로 등장한 한문 사료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캄보디아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특히 중요한 문헌이라고 하겠다.

 

진랍풍토기 개요_판본

현재 남아있는 "진랍풍토기" 판본은 10종 이상이 잇다.

 

01. 설부 100권본
설부는 도종의(陶宗儀)가 편집한 총서인데 산실되었다. 현행 "설부"는 1927년 장종상(張宗祥)이 6종의 명나라 초본(?本)을 교정하여 1930년 상해에서 출간한 것인데 "진랍풍토기"는 그 중 권39에 들어 있다. 다만 眞臘이 아니라 眞蠟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오탈자가 많아 저본 으로는 부적합하다.

02. 고금설해(古今說海)본
명의 육즙(陸楫)이 편집한 총서로서 가정(嘉靖) 23년(1544) 엄산서원(儼山書阮)에서 간행하였는데 이후 1821년, 1909년, 1915년에도 간행되었다. "진랍풍토기"는 '설선부편기가(說選部?記家)'에 실려 있다.

역대소사(歷代小史)본
명의 이식이 편집한 총서로서 이 중 권103에 실려 있다. 만력(萬曆) 12년(1584) 간본이 있고 그 후 1940년 영인본이 있다.

증정고금일사(增訂古今逸史)본
명의 오관(吳琯)이 편집한 총서로서 만력 연간(1573-1620)에 간행되었는데 그 일지(?志)의 분지(分志)에 들어 있다.

중편백천학해(重編百川學海)본
원래는 "백천학해"는 송의 좌규(左圭)가 편집한 총서인데 만력 말에 원래의 100종에 추가로 문헌을 모아 간행되었다.
"진랍풍토기"는 증수된 부분 중 '계집(癸集)'에 들어 있다. 오탈자가 많으며 "고금설해"본에 의거한 흔적이 있다.

중교설부(重餃說?)본
명나라 말에 도정(陶珽)이 "설부"를 중보했다고 전해지는 총서로서 "중편백천학해" 등 여러 가지 총서의 간판(刊板)을 이용하여 120권으로 편집되었다. "진랍풍토기'는 '弓62"에 들어있다. 만력 38년(1610) 간본과 청의 순치(順治) 4년(1647) 간본이 있다.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본
고금도서집성은 청 조정의 명으로 편집된 것으로 옹정(雍正) 3년 (1725)에 이루어진 10,000권짜리 총서이다. "진랍풍토기"는 '변예전(?裔典)'에 들어 있는데 중교설부본을 기반으로 수록된 것이어서 오탈자가 많다. 레뮈사(Remusat)의 프랑스어역의 원본이 이 판본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본
"사고전서"는 청의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간행된 총서로 건륭(乾隆) 46년 (1781)에 일단 완성되었다.
"진랍풍토기"는 '사부지리류(史部地理類)'에 들어 있다. 고금 설해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설고(說雇)본
왕문유(王文濡)이 편집하여 민국(民國) 4년(1915)에 간행한 총서이다.
"진랍풍토기"는 제 29책에 들어 있다. 고금 설해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사료삼편(史料三篇)본
대만의 광문서국(廣文書局)에서 민국 58년(1969)에 간행한 총서 안에 들어 있다. 설고본의 재간행으로 추측된다. 이상의 총서에 담긴 판본 외에 온주시립도서관에 소장된 1829년본(瑞安許氏 巾箱本)과 북경대학도서관에 소장된 초본(吳翌鳳 手抄本)이 있다.

 

역주와 연구

"진립풍토기"의 자료적 가치를 맨 먼저 주목한 사람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아벨 레뮈사(ABEL RIMUSAT, 1788-1832)로서 프랑스어 번역본을 1819년에 간행하였다.
그가 사용한 판본은 오탈자가 많은 고금도서집성본이며 연구 초기 단게였기 때문에 불완전한 점이 적지 않다.

그후 캄보디아에 대한 연구의 진전에 부응하여 발표한 사람이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이다.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가 1898년 하노이에 ‘프랑스극동학원(Ecole Francais d'Extreme Orient, EFEO)’을 개설하였는데 이곳 교수였던 펠리오가 학원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본격적인 역주를 발표(1902년)하였다. 이 역주에 사용한 판본은 고금설해본에 의거하여 중교설부본과 고금도서집성본을 참조하였다.

펠리오의 역주에 부분적으로 보완 교정을 한 사람은 같은 학원의 교수이자 후에 학원장이 되는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es)로서 1918년과 1933년에 두 편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단편이기는 하지만 캄보디아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여 펠리오의 주석과 함께 중시되고 있다.

"진랍풍토기"의 영어 번역은 두 종류가 있다. 길먼 다시 폴(Gilman D’Arcy Paul)이 방콕에서 1967년에 발간한 것과 머스키(J. Mirsky)가 1964년에 시카고에서 간행한 것이다. 둘 다 펠리오의 역주에서 본문만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밖에 중국에서는 많은 관심 속에 번역서와 주석서는 물론, 연구 논문이 다수 간행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72년(高橋保), 1980년(三宅一郞,中村哲夫)에 간행되었다. 특히 그동안 간행된 갖가지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와다 히사노리(和田久德)가 1989년 역주를 간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을 반영하듯 "진랍풍토기" 번역은 단 한 편이다. 서규석의 "신화가 만든 문명 : 앙코르 와트" (리북, 2003)가 바로 그것인데 "진랍풍토기"는 그 중 제3부에 ‘앙코르 시대로의 시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번역은 주로 길먼의 영어 번역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번에 앙코르왓 문화원형 사업의 일환으로 전자불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진랍풍토기"의 저본은 사고전서본이다. 그리고 각주는 서규석의 번역과 와다 히사노리의 일역본("眞臘風土記 : アンコ,ル期のカンボジア", 東京 : 平凡社, 1989)에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사고전서에 실린 ‘제요’를 함께 번역하여 실었다. 캄보디아어의 우리말 표기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표한 ‘외래어표기법’을 따랐다. 그리고 사고전서본에 있는 한문 원문도 함께 실었다. 어쨌든 한자 원본을 바탕으로 한 국내 최초의 번역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