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기록

황희 정승과 청백리

힉스_길메들 2013. 4. 17. 04:17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가장 어질고 슬기로우면 청렴결백한 재상으로 꼽히는 이가 황희다. 고려 말에 때어나 역성혁명으로 개국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70여명의 고려조 신하들과 두문동에 은둔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란 말을 탄생케 했던 황희. 그가 태종과 세종 시대를 찬란히 빛나게 했던 명재상이다 황희의 인품됨은 유명한 두 가지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날 들길을 가다가 밭가는 농부가 귀엣말로 들려준"아무리 짐승이라도 제 잘못을 이야기하는데 좋아 할 리 있습니까?

굳이 잘못을 탓하여 불쾌하게 할 것이야 없지요" 하는 말을 듣고 평생 언행에 조심을 했다는 일화와, 두 계집종이 말다툼을 하다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황희를 찾아왔는데,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하여 서로의 입자를 편견 없이 보았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황희는 그렇게 사사로운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 온화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무에서는 공사가 칼같이 분명하고 날카로웠다.

작가는 요즘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대하면서, 옛 성현의 '나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는 뜻을 되새기며 방촌 황희 선생의 위대한 생애를 복원시켜 청백리 정신을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방촌 황희는 망해 가는 고려를 지켜보았고, 새로 조선조가 개국된 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 임금에 걸쳐 무려 74년 간을 관직 생활을 했으며 90세에 타계하였다. 황희는 조선조 제일의 명상(名相)으로서 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하였다. 황희는 온 백성이 존경하고 따랐으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고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그는 위대한 민족의 선각자로서 청빈사상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황희의 출생과 공민왕의 아내였던 노국 공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말 선초의 중요 인물들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 1330년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원나라에 볼모로 건너갔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고려를 자주국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글을 익히고 열심히 새로운 문물을 배웠다.

공민왕은 1351년에 충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 또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과 인척을 맺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 일족을 쫓아내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우리 땅을 되찾았다.

1368년 중국에 명나라가 건국되자, 공민왕은 이인임을 보내 명나라와 힘을 합쳐 요동에 남아 있는 원나라 세력을 무너뜨렸다. 또한 이성계에게 동녕부를 치게 하고, 오로 산성을 빼앗아 나라의 힘을 과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안으로 무신들이 개인적으로 병사를 갖지 못하게 했고,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다. 또 이 무렵 왕비인 노국공주가 병으로 죽자 왕비를 너무나 사랑하던 공민왕은 실의에 빠졌다.

공민왕은 나라 일을 신돈에게 맡긴 채 불공과 그림 그리기,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신돈은 처음에는 나라 일을 열심히 돌보았다. 그러나 공민왕의 신임을 믿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며 차츰 나라 일을 그르치기 시작했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신하들은 공민왕 몰래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결국, 공민왕은 1374년 자신들의 부정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 신하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공민왕의 죽음 후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인 세력이 성장해 가고 있었다.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홍건적은 공민왕 때 두 차례나 침입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그 피해가 더욱 커서, 오랜 동안 전국의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고려는 외교적 교섭으로 왜구의 창궐을 막아 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국방력을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왜구의 토벌에 나섰다.

남과 북으로부터 침입해 온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은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져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대표적인 무장으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측은 즉각적인 출병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측은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출병을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인 최영 등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나갔다.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두문동에 은거 생활을 하였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새로운 국가 조선의 정계에 복귀한다. 방촌 황희는 유사이래 가장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해 온 인물이다.

황희는 고려 우왕 2년 때인 1376년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 1389년에는 문과에 각각 급제하고,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을 역임하였다.

방촌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하여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며,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누어져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냈다.

한편, 국방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으며, 예법의 확정(廓正)에 노력하여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하여 천첩(賤妾)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그간에 거친 육조정랑·승지·육조판서 등의 역임을 통하여 국정전반에 걸쳐 광범하고 깊이 있는 경험과 식견 및 세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 하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 예문관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고, 내외의 중심(衆心)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왕을 보좌하여 세종 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고,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으며,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작가는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황희와 청빈사상에 대해서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특히 위정자들에게 필독서로 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