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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공 [ 黃石公 ] 관련

힉스_길메들 2011. 6. 4. 13:22

황석공 [ 黃石公 ]

중국 진(秦) 나라 말의 은사(隱士)•병법가(兵法家). 장양(張良)에게 병서(兵書)를 전해 주었다는 노인으로, 장양은 이 병서를 읽고서 한나라 고조의 천하 통일을 도왔다고 함.

 

용례 ;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참을 받았다.…부장 등에게 손자와 황석공 등의 병서를 강하게 하고, 또 성균관 유생과 잡학인에게 닦은 학업을 강하게 하였다. ; 御勤政殿 受朝參…講部將等孫子黃石公等書 又講成均儒生及雜學人所業 [세조실록 권제43, 23장 앞쪽, 세조 13년 8월 1일(갑오)]

 

 

무경칠서 [武經七書] ; 일곱 종류의 중국 병서(兵書)로 손무,오기,사마양저,울요,이정,황석공,여망 

단순히 칠서() 또는 무경()이라고도 한다. 제()나라 출신의 손무()가 쓴 《손자()》(1권), 전국시대 오기()의 《오자()》(1권), 제()나라 사마 양저(?)의 《사마법()》(1권), 주나라 울요(?)의 《울요자(?)》(5권), 당()나라 이정()의 《이위공문대()》(3권), 한()나라 황석공()의 《삼략()》(3권), 주나라 여망()의 《육도()》(6권)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송()나라 원풍() 연간에 이들 병서를 무학()으로 지정하면서 ‘칠서’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무경칠서》에 관한 참고서도 여러 종류가 있어, 송나라 증공량()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무경총요()》(40권), 금()나라 시자미()가 엮은 《칠서강의()》(12권), 명나라 유인()의 《칠서직해()》(12권), 황헌신()의 《무경개종()》(14권), 기타 여러 종류가 있다. 조선에도 수양대군()이 최항() 등에게 편찬시킨 《무경칠서주해()》(10권 5책) 등이 있다. 

 

 

유자가교 [孺子可敎] ; 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는 뜻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를 칭찬할 때 쓰는 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개국한 책사 장량()에 얽힌 고사이다. 《십팔사략()》 〈장량편〉에 전한다. 장량은 본래 한나라 사람이다. 박랑사()에서 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하비로 피신한 장량은, 어느 날 산보를 나갔다가 하비교에서 이상한 노인을 만났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노인이 일부러 신발 한 짝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주워 달라고 하였다. 장량이 주워 오자, 발에다 신기라고 하였다. 장량은 말없이 무릎을 꿇고 신을 신겨 주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빙그레 웃고는 가버렸다.

그러나 우두커니 서 있는 장량에게 다시 돌아와 ‘유자가교’라고 하면서 닷새 후 아침에 다리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닷새 후, 날이 밝자마자 다리 위로 나온 장량보다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내일 다시 나오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다음날 장량이 새벽에 다리로 나왔지만 또 노인이 먼저 나와 있었다. 사흘째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장량에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욕을 하면서 닷새 후에 다시 나오라고 하였다. 노인과 약속한 날의 캄캄한 새벽에 장량은 다리 위로 나갔다. 노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노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노인은 기뻐하며 장량에게 책 한 권을 주면서 10년 후에 제북()의 곡성산() 아래에서 자기를 찾으라고 하였다. 그가 준 책은 《태공병법서》였으며, 노인은 황석공()이라는 기인이었다. 그 책을 연구한 장량은 유방의 책사로서 한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출처] |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

 

 

황석공 소서(黃石公素書) 

중국전국시대에 한(韓)나라 재상가의 후손인 장량(자는 자방, 시호는 문성)이 조국을 멸망시킨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박랑사에서 저격하다가 실패한 후, 크게 노한 진시황의 수배령을 피해 하비현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 하비현에 있는 이교(泥橋 : 진흙으로 만든 다리) 위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삼베옷을 입은 노인이 다가와 일부러 신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을 돌아보고 "애야, 내려가서 내 신을 주워오너라."고 하였다. 장량은 화가 났지만 상대가 노인이었으므로 억지로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신을 주워왔다. 그러자 노인이 "나에게 신겨라"고 하였다. 장량은 기왕에 노인을 위해서 신을 주워왔으므로, 꿇어앉아 신을 신겨주었다. 노인은 발을 뻗은 채 신을 신기게 하고는 웃으면서 자리를 옮겼다. 얼마쯤 가던 노인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장량에게로 다가와서는 "너 이놈 참으로 가르칠만 하구나.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꾸나." 하였다. 기이하게 여긴 장량이 꿇어앉아 "그러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노인은 사라졌다.

 

닷새째 되는 날 장량이 그곳으로 가보니, 노인이 화를 내며 "늙은이와 약속을 하고서 늦게 나오다니, 어찌된 노릇이냐?"고 하며 되돌아 가면서, "닷새 뒤에 좀더 일찍 나오너라."고 하였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 닭이 울 때 장량이 다시 그곳에 도착하니, 벌써 나온 노인이 화를 내며 "또 늦게 오다니, 어찌 된 거냐?" 하였다. 닷새 뒤에 밤이 반도 지나지 않아서 그곳으로 갔더니, 조금 뒤 노인이 나왔다. 노인이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라고 기뻐하고는 책 한 권을 내놓으면서,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으며, 10년 후에는 그 뜻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13년 뒤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이니라."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이 책이 바로 황석공의 소서와 태공망의 병서이며 노인을 황석공이라고 한다. 장량은 이 책을 늘 익히고 송독(誦讀)한 끝에 그 묘리를 깨달았으며, 한고조를 지혜롭게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한고조를 도와 위급할 때마다 계책을 세워 공로를 세웠으므로, 한고조가 그를 보고 "군의 정세를 분석해 군영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데에 나는 자방(子房)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13년 후에 장량이 한고조를 따라 제북(濟北)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게 되었다. 장량이 신기하게 여겨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 장량이 죽자 그 돌을 같이 안장하였는데, 그 후 성묘하는 날이나 복일(伏日), 납일이 돌아오면 장량과 더불어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 장량, 소하, 한신을 한(漢)의 삼걸(三傑)이라고 일컫는다.

 

 

선이 하나 버려지면 수많은 선이 시들고,

악이 하나 상을 받으면 수많은 악이 고개를 쳐든다. 
廢一善 則衆善衰
賞一惡 則衆惡歸 
황석공 (중국 한나라 때의 병법가, 〈삼략三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