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말과글

송창식은 말했다 "세상 나쁜건 다 좋은거라고"

힉스_길메들 2011. 8. 12. 11:29

<기고>대한민국이 도박공화국서 자살공화국으로 변신중
생명경시 풍조는 비장한 아픔의 공감의식 결핍으로 확산

글/박재목 시인

 

“농부는 죽더라도 자신의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 餓死 沈厥種子)는 말이 있다. 얼핏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이 자신이 죽으면 재물도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다는, 집념과 책임의 가치를 강조한 속담(俗談)이다.

최근 자유영혼의 천재 뮤지션 송창식은 “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이라고 했다. 모진 세상의 풍파를 온 몸으로 이겨 낸 자조(自照)의 말이다.

 

 

대한민국은 도박공화국에 이어 자살공화국?

“죽음은 단 한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존엄의 가치가 정반대로 달라진다.”

중화(中華)의 억지논리를 창안한, 역사라는 장르에 인간의 냄새와 지독한 갈등구조를 접목한 한(漢)나라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이 자신의 궁형(宮刑)을 죽음보다 더한 ‘굴욕 중의 굴욕’이라고 한탄하면서 비장한 화두로 참담하게 내뱉은 말이다.

맹호가 깊은 산 속에서 살 때에는 온갖 짐승들이 모두 무서워하고 겁을 내지만, 아무리 맹호라도 함정에 빠지거나 덫에 걸려버리면, 그 때는 꼬리를 흔들면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것이 주변의 인심이다. 위세를 꺾어버리면 어느새 그렇게 변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자 돌아가는 판세다.

이런 관점에서 순간적 아름다움을 휘감는 비장함은 항상 우리의 생명을 유혹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는 말하지 않는가.

“이리로 오라. 강한 것을 숭배하라. 소멸하고 부활하는 영원할 것 같은 아름다움에 복종하라. 덧없이 사라지는 것의 얼굴에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라.”


아름다움을 휘감는 순간적 비장함의 유혹이 넘치고

사전(辭典)은 말한다. 비장(悲壯)함이란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을 당할 때에 그것에 기죽지 않고 의기를 잃지 않고 꿋꿋한 마음을 가하며,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비장함이 아름다운 순간적 유혹으로 둔갑할 때가 있다. 바로 자살이다. 그래서 이를 대비해 가끔은 그 역설의 미학을 기억해 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周)나라 서백(文王)은 구주(九州)의 주인이자 제후였으나 유리(萸里)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李斯)는 진(秦)나라 재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彭越)과 장오(張敖)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주발(周勃)은 여씨(呂氏) 일족을 주살하여 권세가 하늘같았으나 취조실에 들어갔고,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季布)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가는 자들은 모두 그들 지위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일지라도 일단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그 치욕을 씻고자 자살로써 인생을 끝맺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는 티끌세상 속에서도 힙겹게 목숨을 연명하여 자신의 한(恨)을 씻었다는 것이 역사가 남기고 있는 일관된 증언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고, 일단은 죽음을 회피한다. 인간사를 거슬러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이유로 굴욕을 당하면 비장해진다는 사실에도 차이가 없다. 또한 굴욕에 어떤 사람이 용감했고 비굴했느냐 하는 것도 당시의 형세에 따른 순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노예나 노비들도 비장함이 몰려오면 자해(自害)하고 마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개똥밭 가시덤불에 묻혔서라도 간신히 살아남아야 하는, 목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자 하던 일에 대한 한(恨)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가. 그대로 묻혀버린다면, 생명을 순간에 의탁에 버린다면 누가 자신의 비장함을 알 수 있고, 누가 그 한(恨)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겠는가.

예로부터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그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져 버렸다.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여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루어낸 인물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름이 칭송과 함께 인구(人口)에 계속 회자(膾炙)되고 있다.

주(周)나라 문왕은 감옥에서 <주역>(周易)을 연구하여 글로 남겼다. 공자는 곤액(困厄)을 당하고 나서 <춘추>(春秋)를 썼다. 좌구명(左丘明)은 실명(失明)을 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어냈고, 손빈은 함정에 빠져 두 다리를 잘린 뒤에 <병법>(兵法)을 완성했다. 여불위(呂不韋)는 촉(蜀)나라 유배생활이 있었기에 <여람>(呂覽)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에서 갇혔기 때문에 <세난>(說難), <고분>(孤憤)의 글을 펴냈다. <시경>(詩經)의 시 대부분도 고대 성현들이 고난 속에서 분발하여 지은 것이다.

이처럼 전부는 아니지만, 인간사 상당부분 중에서 훌륭하고 빛나는 것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즉 궁지에 몰려 비장함이 넘칠 때라야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 통찰의 고리를 얻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비장함이 넘칠 때 미래의 가치를 일구는 지혜 솟구쳐

“수많은 소들 가운데 하나의 터럭”이라는 구우일모(九牛一毛) 고사는 글자 그대로 볼 것 없는 하찮은 존재를 의미한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좁쌀 한 톨이라는 의미의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은 의미다. 하지만 쉽게 말하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고사(故事) 이면에는 인간의 장구한 움직임을 기록한 위대한 역사가의 비장한 역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 흔적의 역사문학 최고봉(最高峰)인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의 비장한 실화(實話)에서 나온 고사(故事)가 바로 구우일모(九牛一毛)다. 사마천의 철학과 인식, 자신의 비장(悲壯)한 심정이 그대로 투영(投影)되어 있는 <사기>(史記)의 행간을 볼 때, 과연 그가 왜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표현하고, “하늘의 도가 옳은 것인가 혹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非耶)”를 울분으로 토로하면서 그 자신의 억울함과 그 시대상황을 통렬히 한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사기>(史記)〈열전>(列傳)70편 중 첫 맨 처음에 ‘백이 열전’이 등장한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을 쓰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가려고 작심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다. 영웅호걸도 아니고 박사나 기술자도 아니다. 단지 주(周)나라를 싫어해서 수양산에 숨어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은 노인이다. 전기(傳記)는 매우 짧고 간단하다. 재미도 없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인물들에 의탁하여 나머지 모든 〈열전(列傳)〉의 의도를 간파해 들어갔다.

중국 고대(古代) 은(殷)나라 폭군(暴君) 주왕(紂王) 때의 고죽군(孤竹君, 殷의 附庸國)의 두 아들이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당시 서역(西域)의 백(伯·국경 수비장)이었던 주(周)의 문왕(文王)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周)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왕(文王)은 죽고 그 아들인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였다. 곧 무왕(武王)의 신하가 된 두 형제는 충신(忠臣)으로 자신들의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천자(天子)인 은(殷)의 주왕(紂王)이 달기와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학정(虐政)을 거듭하자 결국 무왕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신하된 입장에서 왕을 시해(弑害)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언을 하지만, 무왕은 이를 뿌리치고 은(殷)의 주왕을 제거하고 주(周)나라를 건국한다. 이에 낙담한 백이와 숙제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주(周)나라의 음식과 의복은 입지도 먹지도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으로 연명(延命)하다가 결국 굶어 죽는다.

이에 사마천은 절망하고 탄식한다. 백이와 숙제처럼 진정한 충신으로 의롭게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굶어죽고, 천인공노할 도적(盜賊)인 도척과 같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은 천수(天壽)를 다 누리는 일을 보면서 “과연 천도(天道)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외쳤다. 끝내 사마천은 이런 모순된 세상의 이치와 하늘의 판단을 원망하고 만다.

이처럼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을 바로 백이와 숙제에게 의탁(依託)했다고 볼 수 있다. <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에 있는 그의 일생(一生)을 간추려 보면 이러한 행간의 의미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

대대로 황제의 사관(史官), 즉 태사(太史) 집안에서 태어난 사마천은 부친 사마담(司馬談)이 가졌던, 일생의 소원이자 유언으로 남겨진 중국 통사(通史)를 완성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마천에게 큰 불행이 닥치고 만다. 당시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북방의 약탈자였던 흉노(선우) 토벌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제압할 것이라 믿고 출병했던 장군 이릉(李陵)은 기대를 저버리고 중과부적으로 흉노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러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의 일족을 모두 역적으로 처형하려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의리에 입각해 이릉의 불가피함을 호소하면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후 이릉이 흉노의 장수가 되었다는 왜곡된 정보를 접한 무제(武帝)는 이릉을 옹호한 신하들까지 모두 처형하게 된다. 특히 황제의 노여움을 산 사마천은 죽음보다 심한 최대의 치욕인 거세를 하는 궁형(宮刑)을 당하고 하옥된다. 황제가 사마천에게 극형을 선고했을 때 아무도 한마디 도와주려 거드는 자가 없었다. 요즘이나 옛날이나 의리 없기는 매 한가지였다.

사마천이 지은 죄는 그 당시 돈으로 50만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안 살림을 몽땅 정리하여도 5만전밖에는 준비할 수 없었고, 항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어서 죄를 지었다는 소문에 누가 돈을 빌려주겠는가. 결국 그는 궁형을 당 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에 수긍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살아남기로 작심한다. 사형보다 더한 궁형의 치욕을 감내하면서 감옥에서 부터 불후의 역작인 <사기>(史記)를 완성해 나가고자 결심한다. 그는 2년 뒤 복권되어 중서령이란 황제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환관(宦官)이었고, 치욕은 마찬가지였다.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하찮은 것이 인간 역사에 끝까지 남아

어느 날 무제(武帝)는 태자의 반역사건을 조사하다 임안(任安)이 사태 수습에 소극적이었다는 고변을 듣고 임안을 투옥하고 허리를 자르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임안은 무제에게 미운털이 박혀 죽을 위기에 놓였다. 사마천에게 임안은 조정의 일을 보면서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서로 인품을 존중하는 정도의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어쩔 수 없이 임안은 황제 비서실장 사마천에게 무제에게 변호를 해달라는 구명 편지를 보냈다. 사마천이 이릉 장군의 흉노 항복 사건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옥고(獄苦)를 치르고 있을 때는 모른척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마천은 임안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고아출신으로 그 자리까지 가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던, 자기관리에 집착한 자였다.

사마천도 조금은 인간적으로 자기를 위해 한마디도 변호 해주지 않은 섭섭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답장이 늦었을 수도 있다. 그 당시 사마천은 이미 내시가 되어 중서령(中書令)의 벼슬을 하면서 막바지 <사기>(史記)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차였다.

결국 사마천은 오랜 고민 끝에 장문의 답장을 써서 임안에게 보냈다. 서글픈 자신의 처지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정과 <사기>(史記)를 완성해야 하는 의지를 울분과 함께 담았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편지를 <보임안서> 또는 <보임소경서>라고 한다.

이런 글들로 사미천의 불굴의 의지를 종합하면, 그가 왜 백이와 숙제를 <열전>(列傳)의 첫 번째 인물로 제시했는지, 또 왜 “天道是耶非耶”를 통한(痛恨)으로 부르짖었는지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어이 사마천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이렇게 술회(述懷)하고 만다. “제가 법으로 받은 처벌은 마치 많은 소들 가운데 하나의 터럭과 같은 것이다.”(假令僕伏 法受誅 若九牛之一毛) 무제가 사마전의 직언에 격노하여 그에게 거세의 형벌을 내릴 때, 사마천은 극도의 치욕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恨)을 씻기 위해, 가문의 전통과 부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개죽음’이라고 단정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의 치욕을 못 이겨 자살로 끝맺는다면 “마치 아홉 마리의 소털 중에서 하나의 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작심하고 역사 저술에 전념했던 것이다.

한 인간이 쓴 불후의 역작 <사기>(史記)는 이렇게 역사의 자리를 차지했다.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하찮은 것에 그칠 수 있었던 사마천의 이름은 죽음보다 더 진한 비장함의 가치로 스스로 새 생명을 얻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찬란하게 남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간 의무이자 신(神)에 대한 작은 도리

어느 시대이건 간에 이처럼 역사의 행간에는 ‘공짜’와 ‘어처구니’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에 죽음보다 더했던 비장한 심정 못지않은 자신의 한(恨), 원대한 꿈을 끝내 완성하려 했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비장함의 가치는 세월을 더하여 빛을 발하게 된다. 역사철학 이전에 이러한 사마천의 웅대한 역설의 의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양한 존재의 의미를 시사(示唆)하고 있다.

다시 서기를 반복하고, 지난 절망을 반복하고, 경험을 되뇌는 것이 역사의 흔적이다. 역사의 흥망성쇠라는 매듭에는 언제나 그 당시의 수많은 애환이 있고, 피를 요구하는 희생과 인내의 기름때가 번지게 마련이다. 한민족(韓民族) 역사도 마찬가지다. 흥망성쇠라는 매듭에는 오늘의 냄새를 잉태한 숱한 사연과 파란의 역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단군시대와 고조선을 필두로 삼한 시대를 거쳐 삼국 시대,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조 시대, 고려와 조선, 대한국과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이 한민족 흔적의 형상(形象)이다. 지금도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 있으니 결국은 피나는 갈등이 뒤따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역사의 매듭에는 처절하고도 애절한 연기, 수많은 절망만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녀, 황산벌에서 5천의 군사로 10만의 나당 연합군과 맞섰던 계백의 비장함이 아니더라도, 평양성이 당나라 침략으로 불탈 때 서고(書庫)의 역사책 말고도 하늘의 자손(天孫)이라는 고구려의 절대정신도 모두 불타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의 강점기도, 북의 남침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찬란한 문화 예술을 꽃피웠던 영화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외적인 안타까움에 속할지도 모른다.

인간이기에 어느 절망의 순간에는 외면하고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눈물의 매욱한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찬란한 부활과 희망의 씨를 잉태할 수 있도록 인간의 역사는 ‘관용’이라는 비장함의 가치를 남기고 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갑자기 마닥뜨릴 수 있는 절망의 매듭을 스스로의 비장한 가치로 절단하고 차단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

최근 군부대 총기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전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고위험사회’에 빠지고 말았다. 자살사이트, 동반자살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살이 유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자살률은 다른 나라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비공식 집계까지 합하면 1년에 1만7천명 이상이 고의적 자해로 종결된다.

불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종교에서 자살, 살인, 신체를 자해하는 행위는 “억겁을 통하여 고통을 당한다”며 근본적으로 엄단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생명 경시 풍조에 휩쓸리기 전에, 차라리 생명에 대한 막무가내씩 오기(傲氣)라도 한번 부려보자는 인식전환의 의식혁명을 선동하고 싶다.

꼭 희망 메시지가 아니라도 좋다. 절망에 빠진 자신이 밉더라도 가족, 이웃, 내일을 어떤 다른 착취와 억압, 억울함에 지배당하지 않게 하자는 이기적인 오기(傲氣)라도 부려보자는 말이다.

“자살이라고, 그대! 비장함의 가치를 알고 하는 말인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이런 오기(傲氣)도 소망스러운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의무이자 신(神)에 대한 작은 도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의식의 정수리에 맴돌고 있는 신(神)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라는 말에 맹종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2분법적 단순체계가 아니다. 세상은 횡과 종, 앞과 뒤, 위와 아래, 빠름과 느림이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평평하고 둥글게 휘몰아가는 유기체적 형상을 지닌다.



“그대!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울림

그래서 꼭 사마천(司馬遷)의 피눈물 나는 비장한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절규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는 생명을 초유(超悠)한 “그대!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울림이 귓전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에 자조(自助)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인위적인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 문화조성을 위한 법률’이 자살 예방의 제도적 틀이라고? 법 제정만으로 자살을 줄일 수 있다는 오만은 어디서 나왔을까? 막대한 예산투입으로 국가가 나서면 자살률은 크게 감소할까?

자살에는 다양한 원인과 보는 시각, 다양한 사회적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근본 문제는 자살 위기에 직면한 당사자, 개인, 가족, 직장 등 사회 전반이 자살의 유혹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어깨동무 공감’이 관건이라는 점이다. 고통 나눔의 사회고리에는 언제나 가치적인 고민이 수반된다.

자살 당사자를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자살은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것에서 촉발된다. 천수를 다하든 스스로 일찍 마감하든 그것은 개인의 삶의 행복과 질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러나 자살행위 자체가 그릇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직 우리 삶을 완성시킬 미래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비장함의 가치’는 선택이 아니라 개인의 판단 차원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