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사는길

"신입사원 마음으로 가정에 재취업… 그래야 은퇴 후 40년 편안"

힉스_길메들 2012. 1. 2. 22:33

[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2> 가정복귀 선행학습 하자
대전여고 동창들 '은퇴남편' 수다 - 퇴직 후 지내게 되는 가정은 이민 가는 것 같은 문화충격
은퇴 후에 토닥거리며 살려면 남편이 국 3개 끓일 줄 알아야
그간 돈 벌었으니 참으라고? 자기 밥값해야 집에서 밥 줘… 집안일 분담 미리 몸에 익혀야

은퇴 준비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은퇴 자금을 모으는 일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준비는 '관계'에 대한 준비이다. 현대인 대부분의 관계는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가정은 잠시 쉬다가 출근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고, 다른 관계들도 엉성하다.

그러나 은퇴 후엔 가정과 사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관계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이민(移民)을 가는 것과 같은 문화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남성이 그렇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 우리나라 여성 72%가 '늙은 남편 돌보는 게 부담스럽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경혜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교수는 "모임·친척 등 주변과의 관계 중심으로 살아온 여성들보다 직장 중심으로 살아온 남성들의 준비가 부족하다"며 "가정과 사회에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재취업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본지와 삼성생명이 공동으로 은퇴를 앞둔 전국 40~50대 남녀 500명에게 부부 간 평소 대화 시간을 물었더니 하루 30분 미만이라는 응답이 42%, 30분~1시간이라는 답이 29%였다. 하지만 은퇴를 하면 20년이 넘도록 매일 많은 시간을 부부가 함께 보내야 한다(본지 설문 결과 '부부가 함께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라는 질문엔 평균 21.8년이라고 답했다). 갑자기 닥친 20년을 어떻게 함께 보내야 할까.

우선 아내의 생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지는 대전여고 29회 동창생 15명의 모임을 취재해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남편들에 대한 속내를 들어봤다.

"이번 달 환갑 누구야? 말 안 하면 안 챙겨 준다", "남편 돈 벌 때 예쁜 옷 사. 지금 안 사면 평생 새 옷 구경도 못 한다", "그래 그래 맞아 맞아. 까르르르." 지난 19일 대전 한 식당에서 이들 15명의 송년회가 열렸다. 동창생이지만 나이는 조금씩 달라 59~62세이다.

남편이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이희용(59)씨, 얼마 전 남편이 은퇴한 박옥순(61)씨, 남편과 함께 15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변명희(60)씨…. 식당 가장 안쪽 방인데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식당 밖으로 새어 나왔다.

지난달 19일 대전 서구 예술의전당 앞 계단에 대전여고 29회 동창생들이 모였다. 이희용(왼쪽)씨가 일어나“우리가 평생 허리 굽혀 밥하고 설거지해 가며 남편 서포트만 해 준 게 잘못이야. 이제부터라도 허리 더 꼿꼿이 펴고 살자”고 말하자 동창생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프라이팬으로 그냥 확

―난 남편이 아프면 뭐라도 하나 해 먹이려고 가져다 바치는데. 자기는 전혀 그런 게 없어. 아프다고 하면 인상부터 팍 쓰면서 "왜 아프냐"고 물어본다니까. 요즘 남편이 잠에서 깰 때 프라이팬으로 눈을 눌러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니까. 일어나지 말라고.

―퇴직한 우리 남편은 종일 집에서 TV만 봐. 새벽 2시까지 드라마, 스포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26살 아들은 취업 준비하고 있는데. 내가 맨날 "와이프가 싫어하는 걸 덜 하고 사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안 변해. 자기가 그동안 돈 벌어 왔으니 그 정도는 참으라 이거야.

―솔직히 나중에 70 넘어서 황혼이혼당하면 남자들만 손해지. 안 그래? 어차피 60 넘어가면 부잣집 마나님이나 사장님도 전부 다 중고품이라고. 남자들이 위기의식이 없어.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최소한 남자가 국 세 가지 정도는 끓일 줄 알아야지. 그래야 나 없어도 밥이라도 먹을 거 아냐. 근데 아주 그냥 생각도 안 해. 내가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콩나물국 한번 끓여 봐요"라고 하면 5분도 안 돼서 "콩나물 어디 있는데" 물어보고, 또 조금 있다가 "젓갈은 또 어디 있어" 물어보고. 이렇게 몇 번 물어보다가 "나 안 해, 뭐 이리 귀찮아"라면서 소리를 빽 지른다니까.

―집에서 노는 사람 매일 밥해 주는 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그래서 난 5년 전부터 남편한테 "일요일 점심은 나 휴무다"라고 선언했거든. 선행 교육인 거지. 안 해주는데 지가 어떡해. 굶든지, 해 먹든지, 짜장면 시켜 먹든지, 알아서 해야지.

―은퇴 후라도 자기 밥값만 제대로 하면 우리 중에 구박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어떤 마누라도 다 반기지. 은퇴하고 난 뒤에 밥만 먹으면 안 돼. 자기 밥값은 해야 집에서 밥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