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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매력적인 한 여성이 앉아 있다. 30대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이 여성에게 다가온다.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의견이 안 맞아 그러는데요….” 그는 다리를 출입구 쪽으로 향한 채 여성과 마주 앉는다. 낯선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거는데도 여성은 스스럼 없이 합석을 허락해준다. “남자와 여자 중에서 누가 더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세요?” 여성은 남성의 눈을 쳐다보곤 옷 매무새를 고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남자요.” 이 때부터는 대화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남성이 보여준 행동 하나하나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남성은 먼저 앉아 있는 여성과 눈높이를 맞추며 접근한다(eye level). 그러고는 제3자를 핑계로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다(opinion opener). 이때 남성은 상체를 여자와 마주보면서 앉았지만, 다리는 출입구를 향함으로써 금방 일어설 수 있음을 암시한다(body locking). 여성의 경계심을 무장해제하는 몇 가지 ‘테크닉’이다.
두 남녀가 앉아 있는 옆 테이블에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그는 대화를 나누는 남자의 ‘연애 코치’다. 그들만의 용어로는 ‘픽업아티스트(Pickup Artist)’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 바꿔 말하자면 ‘연애술사’라고 할만하다. 여기서 ‘픽업’이란 몇 가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기술로 이성을 유혹하는 과정을 말한다. 인간은 진화하며 매력을 발산하는 방법을 꾸준히 발달시켜왔다. 최근 바디랭귀지와 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연애에도 과학을 접목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픽업아티스트는 자신의 이론과 노하우를 접목해 연애에 숙맥인 남성들에게 훈수를 해준다.
픽업아티스트의 유래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해외의 유명 픽업아티스트로는 스타일·겜블러·미스터리 등이 있다. 모두 본명이 아닌 ‘닉네임(별명)’이다. 픽업아티스트계에서는 개인의 실명을 공개하기보다 주로 별명을 사용한다. 그중 스타일이라는 별명을 쓰는 픽업아티스트의 일화가 유명하다.
스타일의 본명은 닐 스트라우스(Neil Strauss). 스트라우스는 <뉴욕타임스>의 기자로 일하며 2003년 무렵부터 약 2년 동안 픽업아티스트의 세계를 취재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비밀 커뮤니티에 속한 픽업아티스트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후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취재한 사례를 엮어 <더 게임(The Game)>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더 게임>은 전 세계 픽업아티스트와 남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더 게임>은 2006년 <뉴욕타임스>와 ‘아마존닷컴’의 베스트셀러 상위목록에 올랐다.
스트라우스의 인생을 바꾼 것은 편집자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편집자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여자를 유혹하는 법’이라는 글을 보았다고 했다. 픽업아티스트들이 유혹에 필요한 과학적 기술을 고안하고, 서로 활발하게 노하우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한 편집자는 스트라우스에게 픽업아티스트를 취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전까지 스트라우스는 소심한 기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술사 출신의 픽업아티스트 ‘미스터리’의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도 바뀌었다. 그는 자신만의 유혹 기술을 체화했다. 스트라우스는 이 기술을 이용해 톰 크루즈·브리트니 스피어스·코트니 러브 같은 유명인의 인터뷰에도 성공했다. 지금 스트라우스는 <롤링스톤스(Rolling Stones)> 매거진의 에디터이자 유명 픽업아티스트로 활약한다.
최대 1000만 원 고액 수강료에도 연애코치 찾아
한국에도 ‘닐 스트라우스’를 꿈꾸는 이가 많아졌다. 픽업아티스트들에 따르면 현재 픽업아트 관련 커뮤니티가 50여 개가 넘어섰고, 이들 커뮤니티의 가입자는 어림잡아 20만 명은 넘으리라고 한다. 주요 픽업아트 관련 사이트의 하루 방문수도 각각 3000명 정도에 이른다. 가입자수로 보면 지난 1월 기준으로 ‘IMF4.net’이 8만3538명으로 가장 많고, 뒤를 이어 ‘Love Training’(6만2423명, ‘Mars’(1만5063명) 순이다.
요즘 부쩍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한 픽업아티스트의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 입구에는 ‘아방궁(阿房宮)’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다. 초인종을 누르자 키가 훤칠한 남성이 문을 열고 맞아준다. 픽업아티스트 메이스(33·본명 김재균)였다. 가정집을 사무실로 개조한 곳인데 안에는 픽업아티스트가 한 명 더 있었다.
메이스가 차를 권했다. “어떤 차를 드릴까요? 경차와 세단이 있는데….” 썰렁한 유머였지만, 경계심을 해제하는 기술인 듯했다. 그는 요즘 손바닥TV와 CJ E&M, MBC every1을 비롯한 다양한 방송에서 연애 기술을 강의한다고 했다. 요즘엔 길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제법 늘었단다. 사무실 테이블에 놓인 달력에는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다.
“오늘은 2시에 프리미엄 수강생 상담이 있어요. 8~10시에는 손바닥TV 촬영이 있습니다.”
그는 TV특강에서 자신이 가진 유혹 노하우, 여성이 모르는 남성의 심리 등을 강의한다. 화상통화를 통해 직접 시청자와 상담도 한다.
구직자·학생·의사·변호사·소방관·경찰관·자영업자 등 다양한 사람이 그를 찾는다. 그중 공과대 출신 정보기술(IT) 분야 종사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는 “남성이 많은 환경에서 생활하며 여성과 마주칠 일이 적었던 이들이 여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고객 중에는 결혼적령기라고 할 수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남성이 가장 많습니다. 40대도 적지 않아요. 10대가 오기도 하죠. 남자라면 누구든 여성을 유혹하고 싶어하는 듯해요.”
메이스의 강의 중 ‘포텐셜’ 강의는 수강료가 무려 600만~1000만 원이나 한다. 강사 3명이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한다. 강의 목표는 ‘강사 정도의 실력 갖추기’다. “이번 달 포텐셜 강의를 듣는 한 분은 40대 컴퓨터보안업체 CEO입니다.” 포텐셜 수강생은 신분 노출을 꺼리는 기업 임원이나 연예인이 대부분이다. 40대 CEO의 경우 “영업과 사교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강의를 듣는다고 한다. 물론 여성을 유혹하려는 목적도 있다.
이렇게 아방궁을 찾는 사람은 한 달에 65명 정도라고 한다. 비싼 수강료를 내면서까지 유혹의 기술을 익히려는 수강생이 이처럼 많다. 메이스가 운영하는 아방궁은 픽업아티스트 3명이 강의뿐 아니라 방송 출연, 의류사업 등을 통해 1년에 약 20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2009년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이룬 결과다. 메이스는 앞으로 사업분야를 인터넷강의, 외국서적 번역 등으로 넓힐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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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숙맥에서 픽업아티스트로
픽업아티스트들은 이성을 만나는 데 숙맥이었던 고객이 좋은 여성을 만났다고 알려올 때가 가장 기쁘다고 한다. 수입의 80~90%를 애인에게 쏟아부었는데도 이별 통보를 받고 아방궁을 찾은 한 남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메이스는 그가 이별 통보를 받은 이유가 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해결책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외모보다는 ‘이해심’과 ‘자신감’에서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메이스의 도움을 받은 남자는 지금 다른 여성과 열애 중이다.
메이스는 30대 직장인으로 고스트라는 별명을 가진 수강생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분은 키가 158cm였어요. 그래서 20대 때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어요.” 그에게는 픽업의 다양한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간접최면(대화 중 최면기법을 사용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타로(카드를 통해 현혹하는 기술)·폰게임(문자·통화 등 전화로 상대를 유혹하는 기술)·콜드리딩(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 등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댄디룩’과 ‘헤어스타일’까지 조언해준다. 그 후 고스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은 물론이다. 많은 여성을 만나보았고, 지금은 사랑하는 여성과 열애 중이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친 픽업아티스트들이 방송 연습에 열중하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사무실을 찾았다. 9박 10일 과정인 프리미엄 강좌를 듣고 싶다고 했다. 픽업아티스트는 그에게 연애경험·나이· 직업과 수강 동기를 물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요. 연애를 두 번 해봤는데, 처음에는 3개월, 다음에는 3년 만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 깨졌어요.” 메이스는 그에게 이것저것을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다.
사실 메이스는 애초 픽업아티스트를 꿈꿀 처지가 아니었다. 여자를 만나본 경험이 한 번밖에 없는 연애 초보였다. 대학 시절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여성을 사귈 기회도 없었단다. 그러다 2007년 어느 날 우연히 닐 스트라우스의 픽업아티스트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눈뜨게 됐다. 그는 책에서 접한 연애 기술을 직접 적용해보면서 그 기술들을 한국 사정에 맞게 수정하고 보충해 자신 만의 ‘작업의 기술’을 완성했다. 2009년 한 해 동안 그가 만난 여성은 무려 300여 명. 믿기지 않을 정도다.
또 다른 픽업아티스트 오라클(29)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방도시에서 통닭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나리오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시나리오를 사겠다는 영화제작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그 무렵 마침 짝사랑하던 한 여자에게 버림받고 심한 우울증을 앓던 처지였다. 시나리오 작업을 포기했다. 그의 오랜 꿈도 흐릿해졌다. 그때 그의 머리에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픽업아티스트의 세계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연애술사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써보겠다고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간접최면분야의 최고 기술자가 됐다. 숱한 ‘작업’ 성공을 통해 쌓은 노하우와 이론 공부가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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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아트, 관계를 열어주는 마중물
요즘 오라클 밑에는 픽업아트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문하생이 있다. 대학생인 도르체(24)다. 지난해부터 그는 오라클에게서 작업의 기술을 배우느라 ‘열공’한다. 하지만 픽업아티스트가 꿈은 아니다. “전공인 경영학을 살려 컨설턴트가 되려 합니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하고 매력을 발산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드림가이(28)는 IT회사를 다니다가 픽업아트에 푹 빠진 경우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직접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컴퓨터의 가상현실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걸 보고 결심했어요. 인간관계에서 점점 외골수로 빠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사람을 만나는 법을 전해주고 싶거든요.”
한 픽업아트 카페의 회원인 절대남자(44)는 사이트에 “픽업아트는 단순히 여성을 유혹하기보다 타인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 법을 알려준다”는 글을 써놓았다. 그는 “예전에는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상대도 안 해주던 나에게 요즘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연락해온다”고 말했다. 픽업아트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픽업아트의 유용성을 알리는 수많은 일화가 올라와 있다. 그들은 “이제 여성의 심리를 알 것 같다”며 한때 참담했던 지난 경험들을 공유한다.
픽업아티스트 써커피쉬(28·본명 박순기)는 “처음에는 ‘원나이트스탠드(하룻밤 연애)’에 필요한 ‘작업’ 멘트를 익히려고 픽업아트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를 찾는 남성이 많았지만 그들도 픽업아트를 공부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여성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해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책으로만 배웠어요’라는 광고 카피가 있지요. 그것이 우리의 현주소라고 봅니다. 픽업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이성을 유혹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구가 녹아있다고 봅니다.”
김영수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픽업아트의 확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연애 상담은 친구나 선배를 통한 상담이 대부분이었지만 온라인 기반 사회가 오면서 직접 대인관계를 경험하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새로운 풍조가 생겨난 듯하다”고 말했다. 컴퓨터 게임이나 문자, e-메일, 채팅 등 온라인 상의 관계에 익숙해지다 보니 현실에서 인간관계가 익숙하지 않다는 진단이다. 김 교수는 “현대인은 진정한 인간관계를 체득,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픽업아트는 결코 ‘작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픽업아트는 여성에 관한 남성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듯하다. 매력적인 남성이 되기 위한 노력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