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기록

부서진 벽·천장엔 물 뚝뚝… 슬럼(slum·불량 노후 건물지역)이 된 개포지구[조선닷컴 펌]

힉스_길메들 2012. 3. 1. 03:51

주공아파트 1~4단지, 10여년간 '재건축 예정'
주민 80%가 세입자… 주인들 집수리 신경 안써

"여기가 강남에 있는 아파트라면 누가 믿겠어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1단지에 사는 권모(65)씨는 안방에서도 내복과 점퍼는 물론 털모자까지 눌러쓰고 지낸다. 이렇게 '완전 무장'을 하고 전기장판 위에 앉아 있어도 덜덜 떨린다.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온수도 잘 나오지 않는다. 가스레인지로 세숫물을 데워 쓸 때가 많다. 권씨 가족이 사는 56㎡(17평) 아파트를 친구들은 '북극'이라 부를 정도다.

강남구 개포동 주공 1단지 주민 권모(65)씨 집은 냉기(걑氣)로 가득하다. 벽과 창문 사이 틈에 임시방편으로 비닐을 여러 겹 둘러 놓았지만 외풍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정상혁 인턴기자(연세대 4년)
이 아파트에 사는 일용직 근로자 박모(45)씨는 "매일 집을 '땜질'하면서 산다"고 했다. 손톱으로 벽을 긁으면 콘크리트가 떨어질 지경이고,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새 곳곳에 곰팡이가 슬었다. 박씨는 집주인이 수리를 책임진다는 내용을 담은 임대 계약을 맺었지만, 계약대로 해준 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직접 고친다. 박씨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전셋돈 안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곳곳에 금이 간 낡은 아파트들이 서 있는 주공아파트 단지는 저녁이 되면 폐가를 방불케 한다. 아파트 5개 동 사이에 가로등이 단 2개에 불과한 곳도 있다. 한 주민은 "해가 지면 집 밖에 나가기 무서울 정도"라고 했다.

슬럼화하는 개포지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는 재건축 사업이 계속 지연되면서 슬럼(slum·불량 노후 건물지역)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개포동 주공아파트 7개 단지 가운데 좁은 평수에 노후화가 심해 재건축이 확실시되는 곳은 1~4단지다. 개포주공 1단지는 재건축이 가능한 'D등급' 노후화 판정을 9년 전인 지난 2003년에 받았다.

이곳 주민의 80% 정도는 세입자로 알려졌다. 대부분 저소득층이다.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개포 주공 1단지를 기준으로 36.3㎡(11평)는 보통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 가장 큰 평수인 59.4㎡(18평)는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가 80만원 선이다.

이 아파트의 집주인들은 10여년 전부터 재건축을 기대하는 상태라 '어차피 헐어버릴 텐데'라는 생각에 난방이나 시설 수리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가뜩이나 지은 지 30년에 가까운 아파트의 노후화가 심해지고 있다.

올 들어 이곳 주공아파트는 시세가 급락하고 있다. 서울시가 뉴타운사업을 구조조정하고, 재건축을 하려면 소형 평형(60㎡ 이하) 비율을 늘리라고 주문하면서 더 심해졌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집주인들은 더 신경 쓰지 않는다. 누수나 보일러 고장 등을 고치는 경우가 드물다. 주민은 "재건축 대상인데 (집주인이) 뭐하려고 돈을 들이겠느냐"며 "개포동 아파트 주인들은 재건축 이후 앉아서 돈을 벌게 될 그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건축 지연에 반발 확산

개포지구 재건축연합회는 지난달 29일 오후 주민 1500명(경찰 추산)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시가 최근 내비친 소형 주택 의무비율 상향 등에 대해 항의했다. '박원순표 정치쇼에 개포 주민 다 죽는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시민의 고통제작소 만드느냐' 등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장덕환 개포지구 재건축연합회장이 "박원순 시장이 자기 정치 이념을 개인의 재산권에 들이대 행정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법 위에 서울시 있고, 서울시 위에 박원순 시장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주민들은 "옳소!" 하며 손뼉을 쳤다.

최모(66)씨는 "개포1단지 13평(42.9㎡) 아파트를 처음 분양받아서 현재 30년 동안 살고 있다"며 "비가 오면 물이 새서 양동이를 몇 개씩 받아놓고 사는데 이런 아파트를 재건축 안 해주면 어디를 해주느냐"고 말했다. "박 시장이 이곳에 와서 딱 한 달만 살아보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오는 16일에는 서울광장에서 200여개 재개발·재건축 구역 주민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 주택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규탄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변선보 주거환경연합 정책실장은 "최근 서울시가 뉴타운 출구 전략, 용적률 상향 규제, 재건축 소형 평형 확대 등 사업을 억제하는 쪽으로만 가고 있다"며 "대다수 주민이 개발을 원하는 구역에는 용적률 상향, 도로 등 기반시설 설치비용 지원, 세입자 대책비용 정부 분담 등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