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우완탕면
완탕면은 패스트푸드처럼 간편하게 먹는 음식
인터넷에서 우연히 ‘완탕면’이란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영화 ‘중경삼림’의 분위기와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뒤이어 완탕면으로 보이는 음식을 먹었던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영상들이 휘리릭 떠올랐다. 영화를 볼 때는 무심히 넘겼는데 영화와 음식이 연결되면서 완탕면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홍콩영화 ‘중경삼림’은 엇갈린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담았으면서도 중국 반환을 앞둔 90년대 중반의 음울한 홍콩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영화는 시작부터 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운 홍콩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견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왕가위 감독의 오래 전 영화.
왕정문은 짝사랑하는 양조위의 집에 몰래 들어와 집안청소를 해주다가 중간에 후루룩 거리며 국수를 먹는다. 바로 이 국수가 완탕면이지 싶었다. 또 홍콩의 명물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앉은 자세로 양조위의 집 안을 훔쳐보는데 이때도 그녀의 손에는 음식 그릇이 들려있다. 이 음식 역시, 완탕면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완탕면은 홍콩에서 패스트푸드처럼 집 밖에서 간편하게 먹는 음식이지 집에서 끓여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한다.
청(淸)대부터 내려온 완탕면, 홍콩 맛 그대로 한국 들여와
서울 홍대앞의 <청키면가, 忠記麵家>는 홍콩 <청키면가>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지난 3월 개점하여 한국에 본고장의 완탕면(운탄면, 雲呑麵)을 선보이고 있다. 실크의류 사업을 하는 김씨는 홍콩을 왕래하면서 완탕면으로 유명한 <청키면가>에 자주 들렀다. 완탕면을 한국에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김씨가 한국 진출을 제안, <청키면가>의 동의를 얻으면서 열게 되었다.
완탕면은 청나라 때 처음 생겨 후베이(湖北) 지방에 전해 내려왔다고 하며 지금은 광동지역과 홍콩의 대중음식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맥(麥)씨 가문이 완탕면을 팔기 시작한 것은 약 200년 전이다. 60여 년 전에 중국 광저우에 맥씨 집안에서 ‘지기(池記)’라는 음식점을 내고 완탕면을 팔았는데 당시 광동의 군벌인 진제당(陳濟堂)과 연극 배우였던 설각(薛覺) 등이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지기는 홍콩으로 이전하여 아들인 맥망(麥奀)과 손자인 지충(志忠)으로 이어져, 지금의 <청키면가> 02-322-3913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식당은 2011년 홍콩판 미슐랭 가이드에 면 전문점으로는 드물게 등재되었을 정도로 정통 완탕면의 맛을 인정받은 집이다. 한국 청키면가는 완탕면에 들어가는 면인 에그 누들을 비롯한 상당수 주재료를 홍콩의 본사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온다. 운반시간이 짧아 재료의 선도가 높으므로 음식의 식감과 맛이 현지와 거의 차이가 없다.
- ▲ 짜장로미엔
육수에 새우 만두 들어간 완탕면과 육수 없는 ‘짜장로미엔’
완탕면은 건어물과 돼지고기로 국물을 낸 뜨거운 육수(상탕 上湯) 에 새우로 만든 소를 넣어 빚은 만두의 일종인 완탕(운탄, 雲呑)과 계란으로 반죽한 면이 들어간 음식이다. 면발은 우리나라의 소면보다 가늘고 마치 얽힌 실타래처럼 꼬불꼬불하며 엷은 노란색을 띠었다. 메뉴 이름은 새우완탕면(正斗雲呑麵, 소 5,500원, 대 8,500원)으로 이 집의 주 메뉴다.
주인장 김씨의 설명에 따라 국물에 하얀 후추와 적식초를 약간 뿌리고 새우가 들어간 만두는 적식초에 찍어서 먹었다. 면발을 씹으니 뽀드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식감이 쫀득해 씹을 때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즐거운 긴장감이 생긴다. 국물은 담백하다. 새우가 들어간 얇은 피의 만두도 씹을 때마다 해물의 미각을 충실히 전달한다. 매운 맛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라죠장(핫소스)을 넣어 먹는데, 생각보다 매우니 조금씩 넣어가면서 양을 조절해야 한다.
육수가 들어간 완탕면과 달리 물기 없는 면 음식을 로미엔(撈麵, Lomien)이라고 한다. ‘로(撈)’자는 물속에 있는 건더기를 건지기 위해 휘젓는다는 뜻인데, 국물은 취하지 않고 휘휘 저어서 건진 면만을 사용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같다. 삶아내어 건진 면(에그 누들)에 고유의 장을 넣어 볶은 돼지고기를 얹은 것이 짜장로미엔(7,500원)이다. ‘짜장’은 ‘장(醬)을 볶는다(灼)는 단어의 중국어 발음이다. 볶은 춘장을 소스로 삼아 만든 한 가지 자장면만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중화권에서는 여러 가지 장을 넣고 다양한 식재료를 볶아서 수많은 ’짜장면‘을 만들어낸다.
짜장로미엔은 완탕이나 수교를 추가하여 곁들여 먹을 수 있다.(9,500원) 완탕이 새우가 들어간 만두라면, 수교는 돼지고기에 목이버섯과 죽순이 들어간 만두다. 서로 이질적인 기름진 돼지고기와 담백한 에그 누들을 함께 먹는 맛이 절묘하다. 사이드 메뉴인 ‘초이삼 데침과 굴소스’와 ‘카이란 데침과 굴소스’(각각 대 5,000원, 소 3,000원)도 산뜻하면서 고소한 맛이 나는데, 홍콩과 중국 광동지방의 대표적인 채소라고 한다. 카이란은 갓과, 초이삼은 유채와 비슷해 보였다. 역시 홍콩인들이 평소에 즐겨먹는 채소로 식이섬유가 풍부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재배하는 곳과 계약을 하여 하루에 한정된 물량만 가져오기 때문에 조기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음식은 강력한 문화의 코드’ 새삼 느껴
영화 중경삼림에서 받은 이미지와 강렬한 호기심에 끌려 완탕면을 찾아와 먹어보니 애초 상상했던 맛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우리의 짬뽕이나 일본의 라멘과 비슷할 것으로 짐작했는데 완탕면의 맛은 흔들림 없는 담백함이 주조였다. 신기해하며 맛을 보고 있는 기자 옆에서 진지하게 완탕면을 먹고 있는 여성 고객이 있었다.
그녀는 이 집의 단골손님이자 홍콩에서 온 ‘동 아 지(Tang A Tsz, 30)’ 씨였다. 동씨는 홍콩에 있을 때 먹던 바로 그 맛이라면서 고향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사람의 입맛 아닐까. 시대와 체제는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의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150년 동안 청나라의 홍콩에서 영국의 홍콩으로, 다시 중국의 홍콩으로 변했어도 그들은 여전히 그저 홍콩인이다. 집밖에 나가 무시로 완탕면을 간편하게 먹는…
나와 동 아 지 씨는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완탕면을 먹었지만 그녀의 완탕면과 나의 완탕면이 같을 수는 없다. 그녀의 완탕면 그릇 속에는 고명으로 가족과 친구와 고향이 더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