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멋집n요리

전남 담양군 남면 '바람소리'

힉스_길메들 2011. 12. 30. 23:30

송강 옛터, 정철의 후손이 차린 품격 높은 밥상

길 끝에서 만난 명당자리 한정식집

대숲과 배롱나무 우거진 숲 사이로 여울이 이어진다. 여울을 따라 좁다란 숲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웬만큼 올라왔는데 <바람소리> 061)382-5266 는 자신의 모습을 쉬 보여주지 않는다. 길은 가늘었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마치 승과 속을 이어주는 끈처럼. 이마에 살짝 땀이 났어도 여울 물소리와 가끔씩 울어주는 새소리가 있어 힘든 줄 몰랐다. 드디어 길 끝나는 곳에 <바람소리>가 수줍게 나타났다. 과연 명당이었다. 올라왔던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불거리는 여울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 그 용은 계곡을 따라 꿈틀대면서 정면의 무등산 서석을 향해 틀임을 하였다. 식당에 당도한 순간, 빈 배를 채우러 온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채우러 산문(山門)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이 식당은 조선시대 서인의 영수이자 가사문학의 종결자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16대손인 정구선(73) 씨가 부인 홍혜미(67) 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광주지역에서 시민운동으로 명망이 높았던 주인장 정씨와 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부인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터에 차린 한정식집이다. 원래 정씨 동생이 ‘자미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식당을 정씨 부부가 현직에서 은퇴하여 품격과 참살이(웰빙) 요소를 강화한 한정식집으로 재개점을 하였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식당 외관과 내부, 환경과 교육 분야에 평생을 바친 주인장 부부의 인품,  송강의 체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주변 경관, 종가의 정갈한 음식에서 명문가의 향기와 높은 품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남도식과 서울식 공존하는 정갈한 음식

정식은 A(2만원)와 B(1만 4,000원) 두 가지가 있는데 3인분 이상이어야 주문이 가능하다. 2인일 경우, ‘2인정식’을 따로 마련하였다. 4만 2,000원과 3만 2,000원, 두 가지 세트가 준비되어 있으며 기호에 따라 요리를 추가로 주문할 수도 있다.

정식의 주요 구성 메뉴는 탕평채, 잡채, 샐러드, 어전, 삼합 등의 요리가 있다. 요리를 먹고 나면 식사가 나온다. 강낭콩이 들어간 밥과 함께 참치찜, 황태구이, 떡갈비, 명태코다리찜, 두릅 피클, 토하젓, 산나물 모둠 등의 반찬으로 짜인 밥상이다.

이 집이 지역적으로 전남 담양이어서 남도음식의 개성이 강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주인 부부가 전국 누구에게나 심지어 외국인의 입맛에도 맞는 ‘순한 음식’을 지향하고 있어 대체로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주조를 이룬다. 굳이 따지자면 전라도식과 서울식이 편안하게 공존하는 한정식이다.

한정식 최고 전문가인 오원자 씨에게 메뉴에 관한 많은 부분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톡 쏘는 홍어와 깊은 맛을 내는 돼지고기 수육, 이들을 넉넉히 감싸주는 묵은지의 삼합은 영락없는 남도의 ‘징한 맛’이다. 새우젓과 갈치젓 등 여러 가지 액젓이 들어간 김치와 토하젓은 남도밥상임을 증명해주었다. 그런가하면 청포에 쇠고기를 넣고 숙주나물 오이와 김 계란 새싹 등이 어우러진 탕평채에서는 서울 반가의 맛과 멋이 풍긴다. 신선초와 양상추에 이 집 안주인이 개발한 소스를 뿌린 샐러드도 고소하면서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어 식욕을 당기게 한다.

몸에 좋은 웰빙 콘셉트의 일품요리인 돼지등갈비찜(3만원),  훈제홍삼오리(3만원), 황태찜(2만 5,000원), 황태구이(1만 2,000원) 등도 안주인의 정성과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신선한 양질의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서인지 뒷맛이 깨끗한 점도 이 집 음식의 미덕이다.

매주 월요일에는 손님이 원한다면 유정란으로 만든 진하고 고소한 계란 프라이를 먹을 수 있다. 정씨 부부가 자택 주변에 풀어놓아 키운 암탉이 낳은 알을 처음에는 식구들끼리 먹었는데 산란 량이 차츰 늘어 손님에게도 제공하고 있다.

옛 선비 풍류와 선경까지 만끽해야 제대로 된 식사

식사를 끝낸 뒤에는 서둘러 내려갈 일이 아니다. 배만 채웠다면 식사의 절반만 끝낸 것이다.  뒤뜰에는 소쇄원 물길을 닮은 계곡이 보이고 4개의 파라솔과 벤치가 있어서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정담을 나누기에 좋다. 계곡 건너에는 나무그늘 아래 평상이 몇 개 있어서 한여름에 잠깐 오수를 즐기거나 짧은 독서를 하면 좋은 듯싶다. 앞쪽 야외 테라스에도 파라솔과 벤치가 있는데, 차를 마시면서 내려다보는 주변 산세가 고울 뿐 아니라 멀리 보이는 무등산 원경도 놓치기 아까운 눈 맛을 연출해낸다.

이곳의 옛지명은 만수동(萬壽洞)이다. 호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경치가 아름다운 무릉도원으로 통했다. 이 자리에 서면 누구나 도연명이 되고 이태백이나 두보가 된다. 옛날에는 이곳이  담양 이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기도 했다고 한다. 식당 아래 계곡은 자미(배롱나무)숲 풍치가 그윽하다. 요즘 보기 힘든 노란 꽃의 골담초도 언듯 스친다. 무엇보다 이곳은 젊은 날의 송강이 자연과 벗하며 시문을 짓고 공부했던 곳이어서 당시의 송강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송강의 입장에서 경치를 감상해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계곡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주인장 정씨의 거처인 ‘계당(溪堂)’이 나온다. 계당은 송강의 후손이자 정씨의 중시조인 12대조 때부터 정씨 집안의 종택으로 내려왔다. 이곳은 송강의 후손들을 비롯한 담양 일대의 사림이나 거유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다. 그런데 1902년에 큰 화재가 나서 안채와 행랑채가 모두 소실되고 사랑채인 지금의 계당만 일부 남은 것을 정씨의 고조부가 중수하여 지금에 전한다.

계당 주변에는 수형이 수려한 배롱나무(백일홍)와 화재 때 타다 다시 살아남은 영산홍, 초봄이면 탐매객들의 발길을 끄는 ‘계당매’ 등이 모두 수령 100~400년을 이어오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계당 옆 안채에선 우거진 수풀 사이로 닭들이 한가하게 노닌다. 점잖게 땅바닥을 헤치며 ‘꼬오~옥, 꼬꼬’ 명심보감과 천자문을 외우고 있다. 명품 계란 프라이를 공급해주는 바로 그 닭들이다.

마음의 허기 느껴질 때 찾으면 좋을 듯

이 식당을 포근하게 감싼 능선을 중심으로 능선 왼편에 소쇄원(명승 제40호), 능선 오른편에 식영정(명승 제57호), 능선 뒷편에 명옥헌(명승 제58호)이 둘러싸고 있다. 가사문학의 고향인 담양, 바로 그곳 담양의 정자 문화권 한 복판에 <바람소리>가 있다. 가사문학 순례나 정자문화 답사 후에, 또는 봄철 담양일원 탐매 후에 들러 송강의 후손이 차린 우리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 집은 품위 있는 가족모임이나 귀한 손님의 접대에 알맞다. 광주나 담양 인근에 업무나 관광차 방문하였을 때 꼭 한 번쯤 들러볼 만한 한정식집이다. 살다보면 가끔씩 정신과 마음의 허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친한 벗들과 함께 오면 더욱 좋을 것도 같다. 한편, 이 식당을 포함한 식당주변의 임야와 전답 대지 등의 소유권을 주인장 정씨가 얼마 전에 문화유산 보호단체인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장차 있을지 모를 후손들의 개인소유로 인한 경관 훼손을 막고 송강의 흔적이 짙게 밴 이 일대의 문화유산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