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멸치를 넣고 되직하게 끓인 된장
부산 가면 멸치쌈밥 먹어봐야한다?
외식업 창업관련 전시회가 열린 부산 벡스코 행사장에 취재차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밀려올 관람객을 예상해 업체마다 홍보물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아침부터 쏟아지는 폭우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도 행사장은 파장 분위기였다.
점심이나 먹으려고 부산 토박이에게 맛있는 밥집을 물었더니, 멸치쌈밥 먹어보았느냐고 되묻는다. 아직 못 먹어보았다고 했더니 부산에 왔으면 꼭 먹어봐야 한다면서 멸치쌈밥에 대한 찬양과 설교가 끝날 줄 모른다. 설교가 끝나길 기다렸다가는 점심 굶을 것 같아 중도에 대충 인사를 차리고 ‘멸치쌈밥교도’가 가르쳐준 중앙동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중앙동 어느 지하주차장 입구 추녀 밑에서 지나가는 부산시민들에게 물었다. ‘멸치쌈밥 진짜 맛있게 하는 집이 어디냐’고. 대체로 <중앙대구탕>과 <통영멸치쌈밥집>을 추천해주었다. 가까운 통영멸치쌈밥집으로 들어갔다. 풍채 좋은 안주인이 반긴다. 그녀의 얼굴에 ‘인심 좋은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통영멸치쌈밥집> 051-245-0030
의 임성희(46) 대표다.
“어서 오이소, 퍼뜩 오이소! 여기, 멸치 두 개요.”
- ▲ '멸치쌈밥'이란 멸치를 넣고 되직하게 끓인 된장을 쌈 채소에 밥과 함께 쌈을 싸먹는 음식이다.
‘멸치쌈밥(6,000원)’이란 멸치를 넣고 되직하게 끓인 된장을 쌈 채소에 밥과 함께 쌈을 싸먹는 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은 집에서 흔히 강된장을 끓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멸치는 흔히 보아왔던 멸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이른바 ‘대멸’인 왕 멸치다. 얼핏 보면 꽁치로 보일 정도로 어른 손가락만큼 굵다. 통영이나 제주에서 구입한 멸치를 냉동시켜 두었다가 필요한 양만큼 그때그때 꺼내 쓴다.
만드는 방법은 아주 단순명쾌하다. 뚝배기에 물을 붓고 된장과 썬 땡초고추와 고춧가루, 이렇게 세 가지만 넣은 뒤 멸치를 넣고 끓이면 끝이다. 하지만 뚝배기 속이 끓어오르는 순간, 깊고 오묘한 맛은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별다른 조미료나 양념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마술처럼 맛이 기가 막히다. 멸치 자체가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한 모양이다. 구수하고 짭짤하면서도 얼큰하고 달착지근하게 감기는 듯한 맛이 난다. 땡초고추에 고춧가루가 가세했는데도 매운 맛이 독기를 품지 않았다. 매운 맛은 멸치의 감칠맛과 된장의 구수함 안에 갇혀 있었다.
나오는 쌈은 상추, 다시마, 치커리가 기본이다. 밑반찬으로 콩잎 장아찌, 시금치 무침, 콩나물과 톳 무침, 멸치젓갈, 갓김치가 나온다.
상추와 다시마에 밥을 얹고 멸치와 된장을 넣어서 먹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미 된장에 우러난 멸치의 감칠맛이 입 안에서 한 번 더 발휘된다. 살집이 푸짐한 멸치는 볼륨감이 느껴지면서 씹을 때마다 침샘을 자극한다. 멸치의 덩치가 크다보니 조림이나 찜을 씹을 때의 식감과 비슷했다.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젓갈도 곰삭은 세월의 맛이 넘친다. 숟가락에 밥을 떠서 젓갈을 얹어 먹었다. 침샘 분비량이 기준치를 초과했다. 한참 먹었는데도 뚝배기 속 멸치 떼는 아직도 한 무리가 남아있다. 멸치가 크고 양을 넉넉히 줘 웬만한 사람에겐 좀 많은 편이다. 먹을 때 멸치 가시가 성가신 사람은 미리 발라먹으면 된다. 하지만 치아가 부실하지 않다면 그냥 먹어도 상관없다.
- ▲ 살집이 푸짐한 멸치는 볼륨감이 느껴지면서 씹을 때마다 침샘을 자극한다.
싱겁고 캐주얼한 맛으로 친정집과 차별화 시도
밥상에서 남도 맛이 나는 것 같아 무심코 주인장에게 고향을 물었다. 전남 순천이란다. 알고 보니 주인장 임씨는 부산에서 멸치쌈밥으로 유명한 <중앙대구탕>이 친정집이었다. 부모님은 임씨가 5살 때 부산으로 와서 식당을 열었다. 원래 대구탕 집으로 개업했는데 주변의 권유로 임씨의 친정어머니 양정심(66) 씨가 20여 년 전부터 멸치쌈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아 오히려 대구탕보다 멸치쌈밥 찾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임씨는 친정집에서 배운 솜씨를 바탕으로 2009년 11월에 멸치쌈밥집을 새로 낸 것이다. 그러니까 멸치쌈밥은 남도 맛의 부산버전이 아닌가 싶다. 영․호남의 남해안도시 일대에도 멸치쌈밥집이 있지만 부산의 대중 정서와 접촉면을 넓힌 것은 임씨 친정어머니인 양씨다. 임씨에 따르면 친정집은 짭짤하고 옛날 맛을 내기 때문에 중 노년층이 좋아하고, 자신의 집은 싱겁고 매콤하게 만들어 캐주얼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 인기가 있다고 한다.
부산의 원로 문인 이상개 시인은 오래 전부터 임씨의 친정집인 <중앙대구탕>에 단골손님으로 출입했다. 시인은 멸치쌈밥과의 인연을 어느새 내면으로 숙성시켰나보다.
'보라! 뜨거운 뚝배기 속에 와글거리는 / 저 싱싱한 멸치 떼들을 / 푸른 상추로 후리질 하여 싸먹을 때 / 잎사귀에 푸들거리는 심해의 맥박은 / 중앙동 가로등 불빛처럼 출렁거린다.' (이상개 시, '멸치쌈밥집' 일부)
임씨의 말과는 달리 이 집에 중년층 손님도 끊임없이 들어왔다. 강정민(60) 씨는 소화가 잘 돼 원래 임씨 친정집이 단골이었는데 사무실 근처에 이 집이 생겨 단골을 바꿨다고 한다. 지금도 생존에 계신 구순의 어머님이 차려준 밥상을 받는 듯 하다는 정용기(58) 씨는 올 때마다 늘 동생 용병(51)씨를 불러 함께 온단다. 형과 함께 부지런히 쌈을 싸고 있는 용병 씨에게 멸치쌈밥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가 정답을 맞혔다. “먹을 때마다 오르가즘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