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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세계 백화점 본점 내 '화니'

힉스_길메들 2011. 12. 30. 23:33

'백화점 식당'의 가능성 보여준 바싹불고기

모던 보이들의 갈등과 욕망 발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청년, 이상(李箱)에게 미쓰코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은 특별한 장소였다. ‘모단보이’였던 그는 늘 새롭고 모던한 대상을 찾아다녔고, 1930년 10월 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은 최신의 낯선 대상을 갈망하던 이상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장소였다. 1932년 「조선과 건축」 7월호에 발표한 ‘AU MAGASIN DE NOUVEAUTES 오 마가쟁 드 누보테(새로운 것들로 가득찬 가게에서)'라는 시에서 이상은 그의 감성을 자극했던 당시 미쓰코시 백화점 내․외부 풍경을 묘사한 바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백화점은 단지 상품만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그곳에서 파는 상품도 효용성만 가진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욕망까지 충족시켜주는 가치가 담긴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명품에 열광한다. 자본주의의 도입기와 일제강점기가 겹치는 불행한 우리 근 현대사에서 당시 지식인들에게도 백화점의 등장과 쇼윈도는 욕망의 대상이었다. 또 그곳은 새로운 감성을 충전시켜주는 장소이면서 자신과 이 민족의 비루한 현실을 확인시켜 허탈감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작년에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이상이 1936년 발표한 날개의 마지막 부분도 바로 신세계백화점(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이 배경이다.

바싹불고기

숯불 없이도 제 맛 내는 바싹불고기와 짜지 않은 간장게장

백화점은 다중이 이용하는 시설이어서 여러 고객의 동선과 안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업소가 가진 실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다. 신세계백화점 10층의 한식당 <화니 火泥> 02-702-2725는 이런 제약조건을 잘 극복한 몇 안 되는 식당이다.

이 집 대표메뉴의 하나인 바싹불고기(1만 7,800원)도 고통스런 개발과정을 거친 메뉴. 고객의 안전을 위해 숯불을 사용할 수 없어서 직화불고기의 특성인 불맛을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양한 시도와 여러 차례 조리 과정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지금은 LNG 가스불로도 충분히 맛을 내고 있다. 다진 고기를 숙성시킨 뒤 석쇠에 구워, 훈향이 적당히 나면서 먹을 때 떡갈비와 직화 불고기의 식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단맛이 적고 자극적이지 않아 외국인들에게 한국 직화불고기의 또 다른 형태로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곁들여 나오는 밑반찬 가운데 단풍나물의 쌉쌀한 맛과 향, 도토리 묵사발의 담백함이 바싹불고기와 잘 어울린다. 미리 데워둔 사기 접시에 고기를 내어와 온기가 오래 유지되도록 배려한 점도 눈길을 끈다.

간장게장
이 집의 또 다른 대표 메뉴는 간장게장(240g, 정식 1만 7,800원)으로 연평도에서 잡은 꽃게를 사용한다. 간장게장도 국내 유명 게장 집들을 여러 차례 벤치마킹하고 나서 조리 매뉴얼을 만든 탓인지 완성도가 높아보였다.

꽃게를 행주로 구석구석 닦아 소주를 뿌려 45분 정도 재워 둔 뒤, 0~1℃에 12시간 숙성시킨 상태에서 양념간장에 잰다. 이 양념간장은 지역진간장과 몽고진간장을 6.5:3.5 비율로 섞은 정수기물에 고추씨 등의 양념과 배, 사과 등 과일, 그리고 감초, 황기 등 한약재를 넣어 3시간 중탕하여 만든 것이다. 이후 간장 붓기와 숙성을 번갈아 한 후, 숙성고에서 일정온도를 유지시키며 보관한다. 염도를 낮춰 만들었기 때문에 2일(48시간) 이상 지난 간장게장은 판매하지 않는다. 완성된 게장은 조리과정을 엄격하게 해, 짜지 않고 군내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꽃게가 숙성과정에서 각종 양념과 간장을 온 몸으로 순순히 받아들여 그 맛에 무리가 없어보였다.

화니 火泥

잘 구운 고기 한 점, 그리고 인생 욕망 혁명

이 집 주인장은 여류작가로는 국내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한 도예가 장영옥(70) 씨다. 상호로 쓰고 있는 ‘화니’도 ‘불에 구운 흙’이란 뜻으로, 도자기를 연상시킨다. 사용하는 반상기중 일부는 직접 장씨가 구운 작품인데 홀의 공간 분할을 위해 쌓아놓은 기왓장의 곡선과 잘 어울린다. 이 칸막이용 기와들은 종로 북촌에서 해체한 한옥에서 가져와 직원들이 직접 쌓아올린 것이다. 무채색의 기와 담장이 밋밋할 수밖에 없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상당부분 상쇄시키고 있었다.

이 집은 상호에 걸맞게 불에 구운 기와 옆에서, 불에 구운 그릇에, 불에 구운 고기를 먹는 집이다. 그 어느 것도 덜 굽거나 더 구워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알맞게 굽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의 식탁과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끝나고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신흥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돈은 많이 있었지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누렸던 권위는 없었다. 늘 뭔가 남과 다름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들은 파리 시내에 생겨나기 시작한 백화점의 단골 고객이 되어갔다.

이상보다 몇 살 연상이었던 채만식이 쓴 소설,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이 서울 명동의 번화가를 구경하다가 애첩인 춘심이가 미쓰꼬시 백화점에서 난찌(런치)를 먹자는 제안을 하자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근대의 길목에 있었던 당시 식민지 조선 유한계층들의 소비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이상과 채만식이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과 이 식당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날개’의 주인공과 윤직원 영감, 춘심이를 이 집 난찌에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그들이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화창한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