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보이들의 갈등과 욕망 발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청년, 이상(李箱)에게 미쓰코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은 특별한 장소였다. ‘모단보이’였던 그는 늘 새롭고 모던한 대상을 찾아다녔고, 1930년 10월 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은 최신의 낯선 대상을 갈망하던 이상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장소였다. 1932년 「조선과 건축」 7월호에 발표한 ‘AU MAGASIN DE NOUVEAUTES 오 마가쟁 드 누보테(새로운 것들로 가득찬 가게에서)'라는 시에서 이상은 그의 감성을 자극했던 당시 미쓰코시 백화점 내․외부 풍경을 묘사한 바 있다.
- ▲ 바싹불고기
숯불 없이도 제 맛 내는 바싹불고기와 짜지 않은 간장게장
백화점은 다중이 이용하는 시설이어서 여러 고객의 동선과 안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업소가 가진 실력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다. 신세계백화점 10층의 한식당 <화니 火泥> 02-702-2725는 이런 제약조건을 잘 극복한 몇 안 되는 식당이다.
이 집 대표메뉴의 하나인 바싹불고기(1만 7,800원)도 고통스런 개발과정을 거친 메뉴. 고객의 안전을 위해 숯불을 사용할 수 없어서 직화불고기의 특성인 불맛을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양한 시도와 여러 차례 조리 과정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지금은 LNG 가스불로도 충분히 맛을 내고 있다. 다진 고기를 숙성시킨 뒤 석쇠에 구워, 훈향이 적당히 나면서 먹을 때 떡갈비와 직화 불고기의 식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단맛이 적고 자극적이지 않아 외국인들에게 한국 직화불고기의 또 다른 형태로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곁들여 나오는 밑반찬 가운데 단풍나물의 쌉쌀한 맛과 향, 도토리 묵사발의 담백함이 바싹불고기와 잘 어울린다. 미리 데워둔 사기 접시에 고기를 내어와 온기가 오래 유지되도록 배려한 점도 눈길을 끈다.
- ▲ 간장게장
꽃게를 행주로 구석구석 닦아 소주를 뿌려 45분 정도 재워 둔 뒤, 0~1℃에 12시간 숙성시킨 상태에서 양념간장에 잰다. 이 양념간장은 지역진간장과 몽고진간장을 6.5:3.5 비율로 섞은 정수기물에 고추씨 등의 양념과 배, 사과 등 과일, 그리고 감초, 황기 등 한약재를 넣어 3시간 중탕하여 만든 것이다. 이후 간장 붓기와 숙성을 번갈아 한 후, 숙성고에서 일정온도를 유지시키며 보관한다. 염도를 낮춰 만들었기 때문에 2일(48시간) 이상 지난 간장게장은 판매하지 않는다. 완성된 게장은 조리과정을 엄격하게 해, 짜지 않고 군내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꽃게가 숙성과정에서 각종 양념과 간장을 온 몸으로 순순히 받아들여 그 맛에 무리가 없어보였다.
- ▲ 화니 火泥
잘 구운 고기 한 점, 그리고 인생 욕망 혁명
이 집 주인장은 여류작가로는 국내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한 도예가 장영옥(70) 씨다. 상호로 쓰고 있는 ‘화니’도 ‘불에 구운 흙’이란 뜻으로, 도자기를 연상시킨다. 사용하는 반상기중 일부는 직접 장씨가 구운 작품인데 홀의 공간 분할을 위해 쌓아놓은 기왓장의 곡선과 잘 어울린다. 이 칸막이용 기와들은 종로 북촌에서 해체한 한옥에서 가져와 직원들이 직접 쌓아올린 것이다. 무채색의 기와 담장이 밋밋할 수밖에 없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상당부분 상쇄시키고 있었다.
이 집은 상호에 걸맞게 불에 구운 기와 옆에서, 불에 구운 그릇에, 불에 구운 고기를 먹는 집이다. 그 어느 것도 덜 굽거나 더 구워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알맞게 굽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의 식탁과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끝나고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신흥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돈은 많이 있었지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누렸던 권위는 없었다. 늘 뭔가 남과 다름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들은 파리 시내에 생겨나기 시작한 백화점의 단골 고객이 되어갔다.
이상보다 몇 살 연상이었던 채만식이 쓴 소설,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이 서울 명동의 번화가를 구경하다가 애첩인 춘심이가 미쓰꼬시 백화점에서 난찌(런치)를 먹자는 제안을 하자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근대의 길목에 있었던 당시 식민지 조선 유한계층들의 소비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이상과 채만식이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과 이 식당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날개’의 주인공과 윤직원 영감, 춘심이를 이 집 난찌에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그들이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화창한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