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난 집 맛난 얘기]
서울 시청 앞 <남도한식 고운님>
서울 하늘이 북국의 하늘처럼 온통 회색빛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금방 눈이라도 쏟아 부을 듯한 기세다. 이런 날은 외톨이 망명객이라도 된 느낌이 든다. 시청 앞 광장을 돌아 숭례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입춘이 지났건만 바람 속엔 가시가 들었다. 허기가 느껴졌다.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와 길을 건너 조금 더 걷자 <남도한식 고운님>이란 간판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 한가해진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법성포에서 택배로 보낸 뭔가를 박스에서 꺼내 아주머니들이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굴비였다. 바로 굴비정식(1만5,000원)을 주문했다.
간제미무침은 막걸리를 부르고
주인장 김형순 씨는 전남 완도군의 고금도가 고향이라고 했다. 투박한 남도 사투리에 정감이 묻어났다. 최근 방영된 90년대 회고 내용의 인기 드라마 탓만은 아닐 것이다. 순간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이용악 시인의 ‘전라도 가시내’란 시가 떠올랐다. 시대와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전라도 가시내와 김씨는 어쩐지 정서적 끈이 닿아있을 것 같았다.
- 고운님 각종 반찬들
잠시 후 반찬이 차려졌다. 슬쩍 구운 김과 간장, 살짝 단맛이 도는 보드라운 묵은지 찜, 젓갈이 잘 삭은 갓김치, 구수한 된장찌개, 된장으로 무친 배추무침, 고기 전, 건새우볶음, 간제미무침 등이다. 이중 압권은 역시 간제미무침이다. 간제미(가오리로 추정되는데 이 집에서는 간제미로 표기)는 홍어보다 작지만 모양이나 맛은 홍어와 비슷하다. 요즘에는 물량 확보하기도 어렵고 껍질을 벗기려면 무척 힘들 텐데 이 집에서는 핵심 찬류의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채를 친 간제미를 막걸리 식초에 빨아서(김씨의 표현) 미나리, 고추장, 쪽파를 넣고 무친 것이다. 김에 싸서 먹으면 바다 냄새가 짙게 난다.
혀끝을 툭 치고 지나가는 새콤달콤한 맛과 미나리 향내가 막걸리를 부른다. 역시나 많은 손님들이 간제미무침을 최고의 막걸리 안주로 꼽는다고 한다. 저녁에는 식사하다 말고 간제미무침에 막걸리를 청하는 손님들 때문에 밥상은 이내 술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고. 그런 손님을 위해 아예 간제미무침을 단품 안주(중 1만 7,000원, 대 2만5,000원)로 준비했다.
- 부세 굴비
몸값 오르는 부세 굴비, 밥에 얹어 먹으면 고향의 안방
반찬을 차리는 사이에 주방에서는 굴비를 찐다. 잠시 후 공깃밥과 함께 굴비가 나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의 총칭’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흑조기 등이 조기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고운님> 굴비정식의 조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이 가운데 부세다. 덩치가 크고 목이 짧으며 꼬리가 가늘고 길게 벋었다.
그러나 부세라고 해서 구박할 일이 아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소득수준이 높아진 중국에서 부세가 ‘황금 물고기’로 불리며 명절의 고급 선물로 부상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주의 어느 수협에서는 부세 10마리 들이 한 상자를 810만원에 경매돼 중국에 팔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 팔자나 생선 팔자나 알 수 없다. 시절을 잘 만나면 제 가치를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건 매한가지다.
이 집에서 쓰는 조기는 소금 간을 한 뒤 6개월 정도 잘 말린 부세 조기다. 건조 과정에서 소금 간을 하기 때문에 따로 간은 하지 않는다.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굴비 살이 도톰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말린 생선 특유의 꾸덕꾸덕한 느낌과 짭조름한 맛이 식욕을 자극한다. 주인장에 따르면 예전 고향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짰다고 한다. 여름에 차가운 녹찻물에 밥을 말아 함께 먹는 조기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주인장 김씨가 비닐 장갑을 끼고 굴비 살을 찢어주었다. 손님과의 소통을 즐기는 김씨는 한가한 시간에는 가끔씩 손님들과 마주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며 말없이 굴비를 발라주는 그 순간, 김씨는 고향의 엄마고 누님이다. 장갑 벗은 마늘 냄새 폴폴 나는 맨손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 고운님 한 상
전남 고금도 식재료로 남도 맛 물씬 내는 남도 음식들
굳이 고향이 남쪽이 아니어도 한국인의 원형에 간직된 고향 정서는 누구에게나 엇비슷하다. 이 집에 들어서서 밥상을 받으면 그 정서가 강력하게 발현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집 음식의 향토성을 뒷받침해주는 식재료의 지역성에 있는 듯하다.
칠순의 주인장 부모님이 현역 농부로 고금도에서 적지 않은 농사를 짓는다. 이 농산물이 이 집의 주 식재료다. 해산물과 생선은 이웃 해안가의 어부 노인 부부로부터 공급받는다. 그때그때 제철 농산물과 해산물을 공급받아 음식을 만들다 보니 계절마다 메뉴가 조금씩 달라지고 가짓수도 많아졌다. 전복, 꼬막, 서대, 우럭, 병어, 홍어, 굴 등으로 만든 음식들은 남도의 바다 냄새 바람 냄새가 물씬 난다. 이 재료들은 단독 메뉴로, 혹은 몇 가지 코스 요리로 손님 상에 오른다.
굴비정식에서 굴비 대신 우럭과 비슷한 능생어와 서대가 올라간 것이 남도정식(3인상, 2인상은 능생어만 올림)이다. 굴비와 더불어 밥도둑으로 악명(?) 높은 게장정식(9,000원)도 있다. 떡갈비와 홍어 등 전통적인 남도 음식과 곰삭은 젓갈로 맛을 낸 찬류도 고금도의 맛을 그대로 옮겨왔다.
이 집은 뜬금없이 고향과 고향 사람들이 그리울 때 동창이나 정다운 사람과 함께 들르면 좋다. 어르신이나 외국인 접대에도 어울린다. 화려하고 무척 값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음식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과 흙 기운이 아직은 남아있다. 무엇보다 주인장 김씨가 가끔씩 던지는 정겨운 남도 사투리가 음식에 얹혀 한결 맛깔스럽게 만든다. 식민지 시대 함경도 시인 이용악이 북간도에서 만난 전라도 가시내는 무사히 뿌리를 내렸을까?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따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 중
<남도한식 고운님> 서울시 중구 태평로 2가 68-1 2층 (02)775-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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