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멋집n요리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기사식당 찾아보니…

힉스_길메들 2011. 12. 30. 23:03

서울 강동구 천호동 기사식당 '은성'02-478-2851

하얀색 포터 트럭이 식당 앞에 멈추자 문이 열렸다. 운전석에서 중년의 여인이 나오더니 채소와 나물 등을 잽싸게 내린다. 주방에서 쓸 식재료를 구매해온 기사식당 ‘은성’02-478-2851의 지일순(47) 사장이다. 운전기사와 주변 직장인들에게 신선한 반찬과 영양가 살린 밥으로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 집의 주인장이다.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기사식당’을 표방하는 지씨, 그녀는 외식업과 인생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아직 그 열매는 온전하게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일할 수 있어서 즐겁고, 음식을 만드는 게 기쁘고,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이 있어 행복하단다. 무엇보다 지금의 치열한 삶이 미래의 언젠가는 달콤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을 믿기에 오늘이 결코 힘들지만은 않다.

중학생 때 처음 시작한 엄마와의 노점 장사 

지일순 사장은 일찍 철이 들었다. 어린 시절, 빨리 돈을 벌어 백혈병으로 누워있는 큰오빠를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롤러스케이트장과 전자오락실에 출입할 때 그녀는 여중생의 몸으로 채소를 다듬고 생선을 손질했다.
어머니가 안양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을 하였는데 오빠 간병과 시장보기 등으로 바빴기 때문에 그녀가 집안일을 거들고 어머니를 도와드렸다. 또래 친구들은 시험기간에만 잠을 줄였으나 여중생 지일순은 잠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평소에도 하루 4시간씩만 잤다. 이 때 생긴 수면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짧은 수면시간에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때 본격적으로 외식업계에 데뷔했다. 한창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시점에 서울 여의도 방송국 앞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던 것. 미술학도로서 붓을 들고 이젤 앞에만 서있기엔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영등포 사거리 고가도로 밑에 낮 동안 세워둔 포장마차 리어카를 해질녘이면 여의도 방송국 앞까지 끌고 갔다.
창피하지도 않았고 힘든 줄도 몰랐다. 다만 한겨울 추운 날 리어카를 끌고 샛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매서운 강바람이 볼과 손등을 때리면서 쩍쩍 갈라놓았다. 설거지통에 손을 넣으면 터진 손등에 찬물이 닿으면서 쓰리고 아팠다.

즉석도정 쌀로 지은 밥에 맛난 반찬이 무려 10가지

지 대표는 처음 식당을 하면서 한 끼 식사라도 제대로 챙겨먹을 수는 있는 집 밥 같은 밥상을 손님에게 제공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밥상의 주인공인 밥맛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정기를 장만, 즉석도정 쌀로 밥을 짓는다.

집 밥이 맛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쌀을 소량으로 구입해, 도정한 지 오래되지 않은 쌀로 밥을 짓기 때문이다. 쌀은 도정한 순간부터 공기와 접촉해 산패한다. 쌀의 산패가 심하면 씻을 때 누런 물이 나오는데 산패 정도가 높은 쌀은 가루가 생기거나 잘 부스러지고 영양가와 맛도 떨어진다. 식당 밥맛이 집 밥보다 떨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대량 구매 후 장기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 집은 지씨가 1주일에 한 번씩 전북 부안의 겉껍질만 살짝 벗긴 현미를 구매, 밥 짓기 전에 매번 즉석에서 도정하여 밥을 안친다. 그러니 웬만한 집 밥보다 오히려 영양가나 맛이 나을 수밖에 없다.

즉석도정 쌀밥과 함께 밥상에 올릴 반찬도 김치를 뺀 나머지는 매 끼니 때마다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것도 이 집의 원칙. 밥상을 받아보면 먹지 않아도 단박에 새로 만든 반찬임을 알 수 있다. 조금씩 자주 무치고 삶고 지지고 볶다보니 지씨가 수시로 화물차를 몰고 시장을 보아온다.

언제부턴가 식당의 이웃 할머니들이 지씨가 시장에서 사온 식재료 다듬는 일을 소일거리삼아 도와준다. 물론 지씨가 용돈조로 수고비를 조금씩 드리는데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고맙게 쓰겠다며 받으신다고. 동네 할머니들이 다듬은 나물이며 채소는 곧장 조리실로 간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즉석에서 만든 반찬들이다 보니 완제품 상태로 구매한 여타 식당 반찬들보다 훨씬 손맛이 깊다.

이렇게 만든 반찬 가짓수가 무려 열 가지. 김치와 나물류를 비롯, 오징어채 무침, 메추리알 장조림, 두부적과 각종 장아찌들까지 나오는데, 모두 맛깔스러우면서 소화가 잘 되는 식재료들만 신경 써서 엄선했다. 김치는 중국산이 판을 치는 요즘, 주인장 지씨는 강원도 고랭지 배추만을 고집해 직접 담가서 쓴다.

식사 메뉴는 황태구이, 조기구이, 고등어구이 백반이 각각 6000원씩이고 요즘 인기 있는 동태찌개와 김치찌개, 제육볶음도 모두 6천 원씩이다. 그런데 가장 많이 팔리는 시골된장찌개는 500원이 싼 5500원을 받는다.

기사 입맛과 취향 파악하려고 택시운전대 잡기도

이 집의 밥과 반찬이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지씨의 오랜 노력과 연구 끝에 나왔다. 처음 기사식당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후 그녀가 처음으로 한 일은 택시회사 입사였다. 기사식당을 하려면 주 고객인 운전기사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ㅈ교통’에 택시 기사로 들어간 지씨는 운전기사의 일상과 식성과 욕구와 행동을 이해할 때까지 영업용 택시를 몰기로 했다. 철저히 운전기사의 입장에서 ‘기사가 이용하는 식당’을 염두에 두었다. 끼니때마다 여러 기사식당을 다니면서 각 식당의 음식과 서비스를 체크하고 잘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비교 평가했다. 석 달 동안 기사식당을 출입해보니 어느 정도 기사식당의 모범답안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사식당 체험 당시, 기사식당에서 주 고객인 운전기사에 대한 푸대접이 제일 먼저 그녀 눈에 띄었다. 근거 없이 운전기사를 폄하하는 기사식당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지씨는 식당을 열면 이 점부터 개선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사들은 대개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에 1인 손님일 경우가 많다. 식당으로서는 ‘바쁘기만 했지 돈이 안 되는 손님’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혼자 오는 1인 손님에게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성공한 외식경영자들 사이에 상식으로 통한다.

지씨가 운전대를 잡고 나서 보니 ‘기사들 입맛이 까다롭다’는 일반인의 인식이 잘못이었다는 점도 깨달았다. 의외로 많은 동료 기사들의 입맛이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기사식당에서 밥을 양껏 먹을 수 없었던 점도 지씨는 불편했다. 밥을 더 먹으려면  1000원을 주고 공기밥을 추가로 시켜야 하는데, 금액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기게 된다. 그래서 이 집은 한 쪽에 대형 밥통을 두고 누구나 양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추가비용은 내지 않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반찬도 마찬가지. 배식대에 가서 추가로 더 먹고 싶은 반찬을 스스로 가져다 먹으면 된다.

손님의 즐거운 식사 위해 자신의 낭만 유예한 일벌레

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다.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그녀의 일은 도무지 끝이 없다. 하루 4시간 정도의 수면 외에는 이렇다 할 휴식도 취하지 않는다.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물었다.

“생각해보니 어떤 때는 잠도 안 자고 연속으로 32시간 쯤 일한 적도 있더라고요. 하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 그게 나를 믿고 도와준 분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는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일주일에 한 번씩 전주에 있는 전북대학교에 다녀온다. 이 학교에 개설된 ‘김치 소믈리에’ 과정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밥과 김치가 맛있어야 진짜 맛있는 식사라면서, 더 나은 김치를 손님에게 대접하려면 이 정도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 집의 옥호 ‘은성’은 50년대 명동에서 박인환, 김수영, 변영로 등이 사랑방 삼아 자주 드나들었던 은성주점에서 이름을 땄다.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니, 이명숙 씨가 운영했던 집으로 유명한 은성주점은 박인환의 시 ‘세월이가면’이 태어난 산실이기도 하다. 청년시절 미술학도였던 주인장 지씨가 명동시대의 분위기와 낭만을 그리며 옥호로 쓰게 되었다.

농익은 만추의 계절이다.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노래로 만들어 가수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 듣고픈 계절이다. 이제 시인 박인환도 가고 은성주점의 주인장 이명숙 씨도 고인이 되었다. 이 가을 마지막 나뭇잎은 공원벤치와 명동뿐 아니라 천호동의 기사식당, 은성 앞 보도블록에도 떨어진다. 그 옛날의 추억들은 나뭇잎에 덮여서 사라진다 해도 주인장 지씨의 외식업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새봄을 맞은 듯하다.

※ 글·사진: 월간외식경영 이정훈 기자, 변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