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준 식재료를 순리대로 조리해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식당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이윤추구 동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먹는 밥이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차린 밥상을 받아보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집 밖 세상에 어디 그런 밥상이 쉽게 있을 리 만무하다.
고향 예천의 들판에서 부모님이 거둔 식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내는 밥집 <소금>은 이런 소박한 바람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요즘 보기 드문 식당이다. 쌀과 콩 등의 곡류와 시래기, 고추, 쌈채류, 양념류 등 음식에 들어가는 주재료들을 시골 본가에서 공급받아 사용한다.
경북 예천군 유천면에서 농사지은 것을 딸네 식당에 대주는 강덕구(78) 최점순(79) 씨 부부는 딸에게 단순히 식재료만 대주는 것이 아니다. 쌀이나 고추보다 더 중요한 게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세와 따뜻한 사람의 정'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가르쳐왔다.
이 집 계산대에는 주인장 강씨 부모님 사진이 있다. '순리대로 살라'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강씨가 장사를 하면서도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모셔두었다고 한다. 그 사진은 손님에게 떳떳하고 정직한 밥상을 내갈 수 있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몸에 좋은 고기반찬에 강원도 산나물과 효소로 무친 야생초 장아찌
이 집은 철따라 나오는 각종 계절 반찬과 요리가 차려진 밥상(장수밥상)이 나올 뿐 메뉴가 따로 없다. 다만, 밥상에 올라가는 주 요리에 따라 오리훈제 불고기가 올라간 것(1만7000원), 고등어구이나 황태구이가 올라간 것(1만3000원)으로 나눈다. 또,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밥상(8000원)도 있다. 어떤 손님들은 이 집을 한정식집이라고도 부르지만 주인장은 그저 밥집일 뿐이라고 한다.
'장수밥상'은 나물, 장아찌, 조림, 김치 류 등의 찬류, 국과 찌개, 부속 요리 등으로 한상을 차린다. 강원도 정선군의 생산자와 직거래 계약을 맺고 공급받는 여러 가지 산나물은 한눈에 봐도 건강식재료임을 알 수 있다. 강씨의 수첩에는 자신이 개발한 24가지 산나물의 레시피가 빼곡이 적혀있다. 이 가운데 산지의 수급 사정에 따라 제철 생나물을 내거나 묵나물로 상을 차린다. 요즘에는 쇠죽 쑬 때 나는 깊은 구수함을 닮은 곤드레 나물, 가지나물, 가시오가피 나물, 고춧잎나물이 올라온다.
장아찌는 강씨가 특히 신경 쓰는 건강식품. 틈만 나면 오미자, 꽃사과, 대추, 모과, 매실, 질경이를 채취해서 효소를 만드는데, 이 효소들은 장아찌를 담글 때 주로 쓴다. 장아찌의 소재도 대개 자연에서 얻은 것들이다. 민들레, 방풍나물, 고들빼기, 가시오가피, 머위, 산마늘, 드릅, 더덕, 당귀 잎, 방가지 싹, 질경이 등이다. 장아찌는 종류가 많아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그날그날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어가며 상에 올린다.
이밖에 늙은 상춧대를 들깨 가루에 무쳐내 식감이 특이한 궁채, 비올 때 제 맛인 두부 지짐, 입안에 향이 오래 남는 곰취쌈도 입맛을 돌게 한다. 오미자 효소를 넣은 야채샐러드, 버섯과 땅콩으로 버무린 매콤한 떡볶이, 야들야들한 잡채도 먹음직하다.
제 맛 살리려 마늘 안 쓰고 양념 가짓수 적게 넣어
우리나라 음식은 양념의 구실이 중요하다. '갖은 양념'이 들어가야 고급음식이고 맛난 음식인 줄 안다. 그중 마늘의 존재감은 특히 부각된다. 그러나 된장국과 황태구이를 뺀 이 집 음식에는 마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다. 양념도 조선간장, 들기름, 참기름, 들깨가루 정도만 넣는다. 이 집은 옥호에 걸맞게, 사용하는 소금도 전남 영광군에서 생산되는 '하얀 햇살금'이라는 천일염을 계약하여 공동으로 구매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결정적으로 소금의 질이 나쁘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강씨는 소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청년 시절, 주인장 강씨는 우리 고유의 제삿밥이나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쓰는 음식에 매료되어 절에 들어가 사찰음식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달지 않고 기름지지 않은 담백함 속에 재료의 본성을 드러낸 음식이 가치가 있다는 것. 양념 맛으로 먹는 것은 참 음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찰음식을 배웠는데 절음식이라고 별 다를 게 없더라고요. 오신채와 고기만 안 들어가면 그게 바로 절음식이지요. 몸과 마음의 독기를 빼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이라면 굳이 절 안과 밖의 음식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네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음료수로 사용하는 연 노란색 치자 물을 한 모금 마시니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 비우니 오히려 차고 넘쳐
주인장 강씨는 지금까지 식재료의 원가를 따져본 적이 없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원가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도 강씨는 자신의 식당 원가나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고. 그래도 음식 만드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어 열심히 하다 보니 손해는 안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경기도 이천에서 한 때 보리밥과 청국장을 팔아 한 달에 1억 원 정도를 남긴 적도 있었다. 돈이 없어 시골 논바닥 한 가운데 식당을 차리고 세운 기록이어서 더 놀랍다. 손님들이 한없이 몰려오자 그녀조차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는 경영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고액의 매출목표를 세우거나 세밀한 판매 전략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단지 부모님 말씀대로 '남을 살리는 마음'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소금'은 성남과 경기도 광주를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338번 도로가에 있다. 서울이 바로 코앞인데 이배재 고개는 마치 강원도 깊은 산속 어느 무명 고개인 듯 가을 냄새를 물씬 풍겼다. 광주를 뒤로 하고 서울을 향해 고갯길을 넘는데 명심보감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직 가시지 않은 당귀 장아찌 향내와 함께 입 안에서 뱅뱅 돌았다.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天者存逆天者亡)"
※ 글·사진 제공: 월간외식경영 이정훈 기자, 변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