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화 불고기, 한식세계화의 또 다른 아이콘
지금은 문단의 중진이 된 어느 작가가 서울에 처음 와서 겪었던 이야기다. 누구나 그랬듯이 예전 시골에서 고기를 먹어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작가도 시골에서 고기를 먹을 기회가 드물었던 것은 마찬가지. 한 번은 어느 선배가 밥을 사겠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 선배 말이 ‘고기 맛있게 하는 집 있으니 가보자’더라는 것. 순간, 이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세상에 그럼 맛없는 고기도 있단 말인가?
과거에 비하면 요즘에는 너나없이 쉽게 고기를 먹는다. 고기의 종류와 조리방법도 다양하다. 이젠 각자의 입맛에 맞는 고기를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중 불고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손꼽힌다.
불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진대(晉代)의 수신기(搜神記)에 기록된 ‘맥적(貊炙)’을 근거로 고구려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다가 원의 지배 하에서 다시 개경을 중심으로 ‘설야멱(雪夜覓)’이라는 불고기가 등장한다. 조선시대 동국세시기에도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훨훨 피워놓고 번철에다가 조미한 쇠고기를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라 한다’는 기록이 있어 불고기 형태의 음식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불고기 하면 사람들이 국물이 들어간 형태를 연상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불고기는 불향이 나는 직화 불고기에 그 맥이 닿아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2년 일본에서 육식 금지령이 풀리면서 여러 가지 고기조리법이 등장했다. 19세기 후반 일본 전통 식재료인 간장을 소고기에 활용한 전골 규나베(牛鍋)와 스키야키가 등장했다. 그러나 육식에 대한 전통이 없었던 일본에 재일 한국인들이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육식 문화를 퍼뜨려 오늘날의 야키니쿠(燒肉)가 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1950년대부터 일본에서 산업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전골인 스키야키는 가정식, 직화구이인 야키니쿠는 식당에서 사먹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스키야키를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중심으로 받아들이면서 스키야키가 국물이 자박한 서울식 불고기의 원류라는 이야기가 있다. 불고기의 주요 식재료인 왜간장과 단맛이 바로 일본의 맛이기 때문에 솔직히 충분히 근거가 있는 가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긴 불고기 역사에서 보면 오늘날의 국물이 있는 습식불고기는 잠시 동안 외부 영향을 받은 변형된 모습일 뿐이고, 불에 직접 구운 건식불고기가 우리 불고기의 원형이다. 따라서 습식불고기가 우리나라 불고기의 간판노릇을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외식공간’ 대표 오진권 씨는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한식세계화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중 하나가 불맛이 나는 직화 불고기’라고 언급하였다. 주한 프리랜서 특파원인 친한파 앤드루 새먼 씨도 일간지에서 ‘ 한국음식 세계화 숯불에 길이 있다’ 고 기고한 적이 있다.
은은한 불향에 간장으로 밑간, 맛이 깊고 담백해
어쩌면 한식세계화의 출발점은 거창하고 화려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울 동대문시장에 여덟 평짜리 작은 직화구이 불고기집이 있다. 주변에 유명한 닭한마리 전문점과 생선구이집들이 오래전에 터를 잡고 있는 가운데 이 식당은 하루 온종일 불고기 굽는 냄새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가 생각보다 깔끔하다. 주인장 박정일 씨는 증권사에 근무했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선물거래업무를 그만둔 뒤 학원사업 등을 하다가 외식업에 뛰어든 것.
이 집은 새벽에 당일 판매할 분량만큼 고기를 양념에 재두었다가 낮에 구워 판다. 고기를 양념에 오래 재지 않아 맛이 강하지 않고 은은하다. 특히 직화구이 방식으로 구워 불향이 나고 담백해 많이 먹더라도 질리지 않는다. 예전에 어떤 행사에서 주최측이 A++ 급 30일 숙성한 한우 최고급 육을 참가자들에게 무제한 제공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모두 환호작약하며 허리띠를 풀고 실컷 먹으려했지만 마블링의 느끼함 때문에 대개 자신의 평소 양을 넘기지 못했던 적이 있다.
직화 불고기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불에 직접 굽는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장으로 밑간을 하여 구워내기 때문이다. 은은한 간장 양념은 양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300~400g 이상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일반 돼지갈비는 양념 맛으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간장소스로 잰 직화 불고기는 양념 맛에 고기의 질감까지 맛볼 수 있다. 불고기 종류는 돼지와 소, 두 가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고기보다 돼지 불고기를 더 맛있어하는 점이 재미있다. 아무래도 소고기보다 바삭한 질감과 지방이 살짝 구워진 고소한 맛 때문인 것 같다.
이 집은 고깃집이 아니라 밥집에 더 가깝다. 고기가 맛이 있으면 고기만 따로 추가로 사갈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찬으로서의 불고기인 셈이다. 개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기념으로 돼지불고기(1인분 200g)를 7000원씩에 판다. 함께 나오는 된장찌개도 먹을 만하고 밑반찬도 고기와 궁합이 맞는다. 그러나 동치미 맛은 좀 아쉽다.
도심 속에서 저렴하게 직화 불고기 맛을 볼 수 있는 곳. 지금은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주 고객이다. 그러나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내방도 점차 늘고 있다. 원래 직화구이의 전통이 없었던 중원에 직화 불고기를 전파했던 고구려의 맥적(貊炙)처럼 이곳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우리의 전통 불고기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업주의 소망이다. 그의 바람대로 외국인들이 한국 불고기 맛을 보기 위해 전 세계의 한국불고기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해본다. 그날은 바로 한식 세계화가 완성된 날이 될 것이다. 02-2271-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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