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사회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바캉스’란 단어는 달갑지 않다. 바캉스라…. 집에 있으면 손해 보는 거 같아서 뭣하고, 길 떠나자니 또 ‘인간 머리’에 치여 지내다 올 것이 불 보듯 훤하니 엄두가 안 나고. 이럴 때 연인을 태우고, 혹은 아이와 와이프를 차에 태우고 그냥 떠나보자. 가방에 챙길 것? 옷가지와 약간의 양념거리, 쌀.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한 시간 반 남짓 달리다 새말 인터체인지로 꺾어들면 42번 국도를 타게 된다. 42번 국도의 끝은? 바로 동해(東海)다.
1. 횡성, 안흥 - 고기와 찐빵
일차 목적지를 정선으로 두고 차를 몰던 중, 남편은 진부 IC에서 빠져나가는 대신 새말에서 국도로 나가버린다. 의아해 하는 내게 길 맛 좋은 42번 국도를 보여주고 싶어서라며, 내 기대를 잔뜩 부풀린다. 한적하게 농가만 펼쳐지던 길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정표는 ‘횡성’과 이어 나오는 ‘안흥’이다.
“헉, 저 횡성이 ‘횡성 한우’의 그 횡성이야? 저 안흥은 ‘안흥 찐빵’의 그…?” 아직 갈 길이 멀기에 여기서부터 수다가 길어지면 안 되겠지만, 찐빵 집 한 곳은 짚고 넘어가자. ‘할머니 안흥찐빵’(033-342-4446)이라는 소박한 이름의 빵집은 작고 예쁘다. 아무 꽃이나 심어져 있는 앞뜰은 때 마침 내린 부슬비에 젖어 싱싱하다.
따끈한 찐빵은 10개부터 살 수 있는데,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편의 다리도 쉬어줄 겸 마당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앉아본다. 비가 내려서인지 때아니게 으슬으슬한 날씨인데, 따끈한 그리고 쫄깃한 그리고 팥소가 전혀 달지 않은 찐빵을 베어 물었더니 뱃속까지 단박에 행복해진다.
2. 정선의 밤 - 황기 족발에 소주 한 잔
정선에 도착하니 어스름하여 일단 숙소부터 정해야 할 판이다. 정선읍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역전의 여인숙들로부터 모텔급 숙소까지 다양하다. “오늘 저기서 잘래!”하고 내가 손을 뻗은 곳은 정선 시내를 가로지르는 천변에 자리한 어느 여관. 대충 짐을 올리고, 3만원의 방 값을 치르고 밥부터 먹으러 다시 차에 오른다.
정선의 이름난 특산물인 황기, 자고로 황기는 기를 보하고 면역력을 길러주며 땀을 멈추게 하고 독성 또한 제거해 주는 만병통치 약재라 했다. 그러니 황기 족발이라는 정선의 명물은 어떻겠나. 황기를 잔뜩 넣고 삶아낸 족발을 들기름으로 반짝 윤을 낸 그 맛은 입에 착착 감기며 쫀쫀하게 씹히는 것이 아주…죽인다.
족발에 소줏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아리랑 가락이 절로 나올락 말락 한다. 정선 역 옆 골목에 있는 ‘동광식당’(033-563-3100)은 ‘TV에도 많이 나온 유명한 집’이라고 역 앞의 약국 주인 내외한테 듣고 갔는데 맛이 괜찮다. 핑크색 형광등이 켜지는 모텔이나 오래 된 여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예 가리왕산 휴양림 근처의 펜션이나 콘도형 민박집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가는 것이 낫겠다.
특히 아이들을 데려 간다면 공기 좋은 마당에서 자전거 타고 뛰어 놀 수 있어 더 좋겠다. 다만, 이 경우에는 취사가 불가피하다. 횡성을 지나면서 고기를 좀 샀다면 숙소로 접어들면서 간간이 눈에 띄는 손두부집에서 두부를, 된장이나 청국장도 조금 챙기면 되겠다.
준비해 간 쌀로 밥을 짓고, 특등급의 횡성 고기는 슬쩍 굽기만 해서 소금 후추에 찍고, 두껍게 썬 두부는 스테이크처럼 지진 다음 다진 마늘, 간장, 설탕, 미림, 후추로 간을 해서 곁들여 먹으면 어울린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구운 김이나 좀 있으면 세 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준 남편의 노고가 싹 풀리겠다.
3. 정선의 아침 - 5일장에서 장을 보다
어제 저녁 비로 하늘이 맑아져서 그런지 햇살이 너무 강해 잠을 다 깼다.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니 장이 서느라 바깥이 바쁘다. 우유 한잔 마시고 터벅터벅 나가보니 입이 떡 벌어지게 큰 장이 섰다. 골목마다 죄다 막고서 장꾼들이 짐을 치고 앉아있는데, 그 품목이 서울의 대형 할인마트보다 다양해 보인다.
골동품, 나물거리, 과일, 과실주, 꽃, 족발, 짚신 등 없는 게 없다. 고춧가루를 조금 사고, 말린 표고와 감자 몇 알, 메밀가루와 황기를 사고 한참을 둘러보니 어느새 점심때. 장터에 먹자 골목이 길게 있어서 자리를 잡고, 콧등치기 국수와 메밀 전을 청한다.
메밀국수의 일종인데, 짤막하게 끊어 만들어서 후룩 먹다보면 면발이 콧등을 탁 친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메밀 함량이 높아서 담백하고, 투박한 것 같지만 계속 먹게 되는 매력이 있다. 여행 중에는 곧잘 과식을 하게 되는데 이 콧등치기 국수를 중간에 먹어주면 소화를 많이 돕겠다.
4. 삼척, 임원 항 - 해산물의 천국
다시 42번 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꼬부랑길이 지루하게 이어지더니 동해시를 지나 추암을 지나 삼척에 다다른다. 42번 길의 끝. 정선의 끈적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그 시원함에 혹해서 또 신이난다. 간단한 취사가 가능한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저녁 메뉴를 찾아 어슬렁 나오니 7번 국도로 갈아타고 임원항으로 내려갈 생각이 난다. 동해의 많은 항구 가운데서도 횟감이 가장 풍요롭기로 소문난 곳.
도착해서 난전 골목으로 들어서니 ‘다라이’라고 부르는 함지박마다 각종 생선을 듬뿍 담아놓고 파는데, 집집마다 그 종류도 조금씩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대성 횟집’(033-572-5138)을 찾아가라는 어느 지인의 권유로 대성 집 마루에 자리를 잡는다. 작은 쪽 창이지만 바다가 보여서 답답치 않고, 자잘한 생선을 회로 주문한다.
이제는 끝물인 성게 알을 따로 부탁해서 맥주랑 먹고, 얌전하게 떠서 나오는 생선회에 야채랑 해서 본격적인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일체의 무성의한 곁가지 반찬이나 서비스 접시들이 없는 대신 가격이 합리적이다. 매운탕을 시키면 소주가 많이 먹힐 것 같아서 쓱싹 비비는 회덮밥으로 마무리. 추암 해수욕장과 임원 항을 오가는 사이에는 크고 작은 해변이 많아서,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멈추고 모래밭의 밤 정취를 느끼면 낭만적이다.
달빛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모래밭을 한 달음 달리고 하다 보면 저녁밥을 먹은 속이 금방 꺼진다. 다음날 아침, 동해에서는 아침에 곰치국을 먹는다지만 나는 연일 걸쭉한 메뉴들을 먹어서 서양식 요리가 입에 당긴다. 장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감자를 발견, 니스 스타일의 가리비 감자 요리를 해보기로 한다. 곰치국을 먹겠다고 나가는 남편에게 가리비 몇 개만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얇게 썬 감자랑 불려서 썬 표고를 올리브기름에 볶는다.
소금, 후추에 집에서 챙겨 간 허브와 으깬 통후추, 소금으로 간단히 마무리 하고 감자를 속까지 익힌다. 익힌 감자는 열기를 식혀서 냉장고에 차게 두는데, 가리비가 마침 도착하여서 손질을 하고, 접시에 올려 준비한 감자와 적당히 섞는다. 가리비가 워낙 싱싱해서 날로 먹으면 향이 좋은데, 팬에 살짝 데치듯이 구워도 상관없다.
어깨끈이 없는 야시시한 원피스에 비치 타월이랑 파라솔을 끼고 해변으로 나간다. 파라솔이 만들어주는 그늘에 숨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가리비랑 감자를 오물거리니 여기가 프랑스의 니스같다. 아이스박스를 싣고 다니는 이들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저렴한 백포도주를 한 두병 준비하면 좋겠다. 진(Gin)을 한 병 준비해도 훌륭한데, 종이컵에 따르고 시원한 토닉 워터만 섞으면 바로 바닷가 해산물에 어울리는 진 토닉이 된다.
5. 무릉계곡 - 더덕 정식과 동동주
동해를 따라 다니는 여행이 좋은 점은 물과 산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점이겠다. 산마다 있는 계곡도 좋고, 그 곁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사찰들도 좋은 쉼터다. 관광객이 제법 몰리는 무릉계곡은 삼척에서 다시 동해 쪽으로 나와서 가게 되는데, 계곡을 볼 요량이면 한 시간 남짓은 걸어야 하니까 식사를 든든히 하는 것이 좋다.
계곡 입구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밥집들이 죽 들어서 있는데, 그 모습은 여느 관광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 선뜻 들어서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곳의 식당 대부분이 계곡 끝자락 흐르는 쪽으로 마루를 깔아 운치 있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먹는 산채와 더덕이 어찌 맛없을 수 있겠나.
계곡 바람은 사악 불고 물은 쫄쫄 흐르고 동동주는 찰지고. 내 아무리 맛 칼럼 취재를 왔다지만 이렇게 신선처럼 놀아도 되는 것인가 고민이 생겨날 정도다. 게다가 동동주에 취해서 절 근처 개울가에 발만 담그고 길을 돌린다. 오르는 길이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산화 차림이다. 무릉계곡까지 오르고 싶으면 등산화 내지는 튼튼한 운동화를 꼭 챙길 것!
여행 박사인 남편을 만나서 따라 다닌 지 벌써 4년째. 우리 둘이 어디를 그리 재미있게 다니느냐고 지인들은 자주 묻는다. 대단할 것 없지만 맛있는 여정들을 본 지면에 살짝 공개하기로 결심한 이 여름, 그 첫길을 42번 국도로 잡은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이 얼마나 이쁘고 풍요로운 땅인지 알리고 싶어서다. 두 개의 국도를 종횡무진 달려 본 첫 회는 대충 여기까지다. 다음은? 기차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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