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왓(ANGKORWAT) 의 완성
앙코르왓 사원은 수리야와르만 2세(1113-1150)가 약 30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위슈누 신에게 바쳐진 사원이며 왕의 사후에는 영묘(靈廟)가 되었다. 이 사원은 남북 길이가 1.3킬로미터, 동서의 길이가 1,5킬로미터에 이름 만큼 광대한 피라미드형 사원이지만 개방형으로 건축되어 좌우 대칭미와 뛰어난 시각성을 자랑하는 힌두사원이다. 또 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고 그 건축의 중심측이 서쪽과 동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도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다.
앙코르왓은 신전의 정 중앙에 있는 중심 탑을 세 겹의 회랑이 감싸고 있으며, 회랑 바깥 쪽에는 주벽을 만들고 그 외부에는 직사각형의 저수지를 만들어 외부로 부터 달절되도록 구성되었다.
40미터 길이의 저수지는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 만들고, 성벽을 4.5높이로 쌓아올려 성스러운 사원을 속세의 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간과 공간개념을 반영했다. 저수지는 크메르인들이 하늘의 은하수와 같은 공간개념을 지상세계에 반영한 것이며, 중앙의 탑과 나머지 좌우로 세워진 두 쌍의 첨탑은 신왕(神王)의 권위와 신분상의 등급을 상징한다. 앙코르왓의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면에 나있는 출입문을 거쳐야 한다.
출입문은 성벽의 동, 남, 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서쪽 출입구는 다섯 개나 된다. 서쪽 출입구를 이렇게 세분화시켜 설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서쪽 출입구의 다섯 개 가운데 두 개는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당시 주력전투부대를 구성했던 코끼리 군단과 기마 군단이 자유로이 출입하여 열병식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나머지 세 개는 탑으로 올라가는 중심 출입구다.
앙코르(ANGKOR) 유적의 재발견
흔히 앙코르 유적은 프랑스인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61)가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그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서양사람 중에서 무오가 처음 본 것도 아니다. 앙코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주달관(周達觀)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이다. 주달관은 원(元) 제국의 성종(成宗) 황제가 크메르로부터 조공을 받아내기 위한 사신으로, 지금의 베트남해안을 따라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 톤레삽 호수를 거쳐, 1296년 4월 앙코르에 도착했다. 그는 이듬해 7월까지 그곳에 머물며 듣고 보고 들은 것을 본국에 돌아가서 여행기로 썼는데, 그것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이다.
앙코르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 워낙 적기 때문에 13세가 말의 앙코르에 관한 개괄적 안내서인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1432년 앙코르 도성이 버려진 후에도 캄보디아는 서쪽의 시암 아유타야 왕조, 동쪽의 베트남 푸에 왕조로부터 협공을 받아 여러 세기에 걸쳐 내외부적으로 전란을 겪게된다.
16세기 중반경 캄보디아 북부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던 왕이 열대밀림에 뒤덮여 있는 버려진 도시 앙코르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1546년에는 앙찬 1세(Ang Chan 1)가 앙코르왓을 수복(修復)하고, 1576년에는 사다왕이 앙코르 부근의 궁정의 일부를 옮겨 아주 잠깐 수도의 지위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후 포르토칼인 선교사 카푸친이 1585~88년에 앙코르를 방문하고 남긴 관찰기를 바탕으로 17세기초 포르투칼의 연대기 작가 ‘디오고 도 코우토'가 재작성한 기록을 남겼으며, 1632년에는 일본인 모리모또(森本右近大夫)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앙코르는 17세기 이후 무인지경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대의 수목이 무성하게 자라 거목의 뿌리에 파묻히게 되었다.
당초 위슈누(Visnu) 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힌두사원으로 세워진 앙코르왓은 그러는 사이에 불교사원으로 변해, 다른 유적들이 버려지고 잊혀져가는 사이에도 인근 주민들이 등불을 이어가며 겨우겨우 지켜와, 인적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인 신부 샤를 에밀 뷔요(Charles Emile Vuilot)는 1850년 12월 앙코르를 방문하고 돌아가, 1858년 파리에서 여행기를 발표했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앙코르 사원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보물로서,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그 건물들은 비록 몹시 낯설기는 했으나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캄보디아는 한때 부강한 문명국이었다. 그러나 문명이 소멸하고 한 때 장엄과 영광이 깃들였던 이 위대한 유적은 지금 밀림 속에 버려져 황폐해졌다” 고 썼다. 그 뒤 앙리 무오가 1860년 1월 22일 앙코르 유적에 가까운 톤레삽 호의 기슭에 도착하여 3주에 걸쳐 앙코르 유적을 탐사하고, 그 석조 건축군과 미술에 관해 정확하게 정리했다.
그는 프랑스 태생의 박물학자로, 영국 여인과 혼인하여 영국 국적을 취득한 후,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위임장을 받고, 자비(自費)로 탐사여행에 나섰다. 1858년 9월 방콕에 도착한 그는 앙코르를 답사한 다음, 1861년 11월 10일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Louang Prabang) 교회에서 과로로 쓰러져 아깝게도 35세의 젊은 나이에 객사했다. 데생과 채색화에 조예가 깊은 그는 앙코르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리는 그림을 그려 최초로 유럽에 제공했다. 그가 죽은 후 1862년 그의 편지가 영국 왕립 지리학회에서 낭독되고, 그의 일기는 1863년 『르 두르 뒤 몽드』(Le Tour Monde)지에 9회에 걸쳐 게재됨으로써, 고대 크메르의 위대한 문명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1864년 영국에서는 단행본으로 그의 학술적인 여행기가 발간되기도 했다. 겸손한 무오는 선배인 뷔요 신부의 기행문을 인용하는 등 자신이 전인미답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출판업자들도 ‘발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무오와 관련하여 발견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하더니, 어느 틈엔가 무오가 앙코르를 발견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무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 앙코르 사원 중의 하나는 솔로몬의 성전이나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에 필적하는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사이에 갖다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사원은 그리스나 로마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장엄하다. 그런데 이런 문명을 개화시켰던 나라는 지금은 야만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비애감마저 느껴진다. 아주 웅장한 유물이 존재한다는 것, 서양의 고대문명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 이상으로 완벽한 예술적 감각을 갖춘 유물이 이 곳 동양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서 빨리 유럽에 알리고 싶다”
그 뒤 1866년 스코틀랜드인 사진사 좀 톰슨(John Thomson) 이 처음으로 앙코르를 사진으로 찍어, 1867년 에딘버러에서 앨범으로 출판함으로써 앙코르가 비로소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간직하고픈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마야나 (0) | 2013.11.01 |
---|---|
크메르 문명 (0) | 2013.11.01 |
앙코르왓(ANGKORWAT) 의의 (0) | 2013.11.01 |
性과 관련된 꿈, 창의력 풍부하다는 증거 (0) | 2013.10.30 |
장어의 종류 (0) | 2013.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