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기록

크메르 문명

힉스_길메들 2013. 11. 1. 12:58

앙코르왓 문명 요약

 

앙코르왓은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현재 캄보디아 시엠립 북쪽 6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야와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왓과 자이야와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와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하고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국력을 쏟아부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
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진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와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이야와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와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이야와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 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이야와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왓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왓은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앙코르 왕조 약사(略史)

 

푸난 시대(A.D.1세기-6세기 중엽)
인도에서 건너온 인도승려에 의해 푸난(FUNAN)에서 시작

진랍 시대(CHENLA PERIOD, 前 앙코르시대, 6세기~8세기)
대륙에서 남하한 진랍이 푸난을 흡수하여 크메르인 최초의 단일국가로 성장하나 자이야와르만 1세가 죽은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수(水)진랍(WATER CHENLA)과 육(陸) 진랍(LAND CHENLA)으로 분리되었을때 샤일렌드라 왕조가 수진랍의 왕을 죽이고 종주권을 행사하였다.

 

앙코르 시대(ANGKOR(또는 KAMBUJA) 802~1431년)
1. 초대 왕, 자이야와르만 2세 (JAYAVARMAN Ⅱ , 802-834)
2. 제 3대 왕, 인드라바르만 1세 (INDRAVARMAN Ⅰ , 877-889)
3. 제 4대 왕, 야소바르만 1세 (YASOVARMAN Ⅰ, 889-912)
4. 제 7대 왕, 자이야와르만 4세 (JAYANARMAN Ⅳ, 928-942)
5. 제 9대 왕, 라젠드라바르만 2세 (RAJANDRAVARMAN Ⅱ, 944-968)
6. 제 10대 왕, 자이야와르만 5세 (JAYAVARMAN Ⅴ, 968~1001)
7. 제 13대 왕, 수리야와르만 1세 (SURYAVARMAN Ⅰ, 1002~1050)
8. 제 18대 왕, 수리야와르만 2세 (SURYAVARRMAN Ⅱ,1113~1150)
앙코르 왕국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크메르 왕국은 이때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앙코르왓을 축조함으로서
불가사의적인 건축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는 열렬한 힌두교 신자로서 앙코르왓을 세웠고 자신을 힌두교의
보호, 유지의 신인 위슈누(VISHNU)와 동일시했따. 사원들은 우주의 중심으로 힌두교의 신들이 거주하는 메루
(MERU)산을 지상에 재현하며, 사원의 주변은 저수지나 해자로 둘러쌓다. 이는 우주를 감싸는 성스러운 대양
을 의미하며 실용적으로는 외적방어와 관개수로로 사용되었다. 앙코르의 전성기로 인구 100만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9. 제 22대 왕, 자이야와르만 7세 (JAYAVERMAN Ⅶ, 1181~1219)
수리야와르만 2세의 죽음 후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시암족과 참파국이 침입하고 참족의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이들을 물리치고 격퇴한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자이야와르만
7세다. 그는 톤체샵 해전에서 참족을 모두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는데 이 장면이 바이욘 사원의 벽면에 생생하
게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자이야와르만 7세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영웅이며 부처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이욘
사원이 있는 거대한 앙코르 톰의 건설과 주위에 '타 프롬', '프레아 칸' 등 불교사원을 건립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수많은 병원을 전국에 건립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베트남의 해안에서부터 말레이시아 반도와 멀리 미얀마까지 최대의 영토를 구축하여 앙코르 왕조 최후의 번성
기를 누렸다. 그러나 자이야와르만 7세 이후 크메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 이후 크메르
왕조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며 1431년 마침내 서쪽 태국의 아유타야 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 된다.

 

앙코르 시대 개관

기원전 1세기경, 캄보디아의 남부 연안지대에서 인도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인도적인 문화와 종교를 토속의 여러 신앙에 융합시켜 받아들인 부남이라는 나라가 일어나 메콩강 델타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남의 속국이었던 메콩캉 중류지역의 크메르 진랍이 5세기경부터 세력이 강성해져, 7세기초 남하(南下)하여 부남을 멸망시키고 국내를 통일했다.

진랍은 자이야와르만 1세(Jayavarman1, 재위 675~681)가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혼란에 빠져 내륙 쪽의 육진랍과 연안 쪽의 수진랍으로 분열되었으며, 수진랍은 8세기경부터 군웅이 할거하여 혼란해진 틈을 그 일부가 인도네시아 자바세력에게 점령당했다. 자바에 포로로 잡혔다가 8세기 후반 귀국한 수진랍의 자이야와르만 2세(재위 802?835)는 메콩강 델타지역의 지배자가 되어 781년경부터 메콩강 중류지역을 정복하고, 톤레삽 호 동안으로 북상하여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802년 앙코르 북동쪽에 있는 프놈 쿨렌(Phnom Kulen) 산에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선포하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자바에의 복속을 거부하고, 왕은 힌두교의 신 시바와 합체된 존재라는 왕즉신의 ‘신왕신앙’에 따라 ‘데와 라자’라는 제의를 집행했는데,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 배경이 앙코르 왕권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앙코르톰에서 남동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 하리하랄라야라는 도성을 조영하고, 크메르 제국 앙코르 왕조의 위대한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야소와르만 1세(Yasovarman 1, 재위 889~910경)가 900년경 수도를 앙코르로 정하고, 제1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야소다라푸라(Yasodarapura)라 했다. 이 도성은 프놈 바켕(Phnom Bakheng)을 중심산으로 하여 그 위에 신전을 건축하고, 앙코르톰의 서남쪽에 토성을 쌓아 완성시켰다. 그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자이야와르만 4세가 921녀부터 944년까지 코 케르(Koh Ker)로 천도함으로써 이 도성은 잠시 버려졌다가,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2, 재위 944~968)가 다시 앙코르로 돌아와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를 중심사원으로 하여 제2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했다.

자이야와르만 5세((재위 968~1001)의 치세는 태평성세여서 문물이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 후 세 사람이 왕위계승자가 다투어 9년 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혈통이 다른 수리야와르만 1세(Suryavarman 1, 재위 1001~1050)가 즉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의 아들 우다야디티와르만 2세(Udayadityvarman 2, 재위 1050~1066)는 바푸온(Baphon)을 중심 산으로 하여 제 3차 앙코르 도성을 조영했다.

그러나 새 도성의 무리한 건설이 화근이 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타이의 북동쪽 코라트 고원에서온 유력자가 왕위를 찬탈하여 왕실의 혈통이 바뀐 다음, 수리야와르만 2세(재위 1113~1150년경)가 왕국을 재통일하여 실력으로 앙코르 왕조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는 크메르 문명의 상징인 앙코르왓을 건조하고, 적극적으로 외국 정벌에 나서 국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대사원의 무리한 건립으로 국력이 피폐해져, 1177년 도리어 앙코르 도성은 참파(Champa, 지금의 메콩강 삼각주의 남베트남) 군의 침공을 받아 왕궁과 사원둘이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자이야와르만 7세(재위 1181~1219)는 참파를 토벌하여 크메르에 병합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를 삼아 바욘(Bayon) 사원을 건립했으며, 앙코르톰을 조영하여 제 4차 앙코르도성을 건설했다. 그는 원기왕성하게 외국을 정벌하여 동쪽으로는 중부 베트남 해안에서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타이 사이의 메콩강 상류지역까지, 북쪽은 랑도스의 비엔티안(Vientiane)까지,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반도를 석권하는 캄보디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제국을 구축했다. 이때 크메르제국의 영광은 최고조에 달했고, 그 수도 앙코르 도성은 넓이 약 1백 평방킬로미터, 인구 1백만명을 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앙코르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원인은 세력이 강성해진 시암(Siam, 지금의 태국)의 아유티아(Ayuttaya)조로부터 1353년과 1364년 연거푸 공격을 받은 데 있었다. 그후에도 양국은 격전을 거듭하다 드디어 1432년 아유타야의 침공을 방어할 힘이 없어 유서깊은 앙코르 도성을 버리고, 남동쪽 240km 지점에 있는 프놈펜으로 천도했다.

찬란했던 앙코르 문명의 가장 큰 붕괴원인은, 반복되는 시암과의 소모전이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한 주민생활의 피폐, 과두정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고대 힌두사상과 체제(카스트제도)의 정체, 지방세력의 할거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 새로운 상죄부 불교의 침투(평등사상)등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시 황폐화의 길을 걷게 된 고도 앙코르는 그 존재조차 망각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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