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말과글

기사와 소설, 이중의 글쓰기

힉스_길메들 2014. 6. 24. 23:24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고 누군가 주장했다. 말씀을 옮기고 퍼뜨리며 권위를 참칭하여 사람들을 다스렸다. 정치가 탄생했다. 처음엔 종교, 나중엔 민주주의의 탈을 썼다. 정치가 탄생하던 날, 사람들은 갈색 사슴처럼 숨죽인 채 숲으로 들어갔다. 겁을 집어먹은 그들은 고개 숙이고 땅을 보았다.

 

 

 

언론의 뿌리는 정치와 문학에

 

말씀 아래 살아가게 된 사람들은 말씀과 상관없는 말을 나눴다. 살고 죽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을 이야기했다. 삶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었다. 문학이 태어났다. 처음엔 입으로 전했고 나중엔 글로 적었다. 문학이 태어나던 날, 사람들은 버석거리는 잉걸을 모아 불꽃을 피워올렸다. 모여 앉은 그들은 웃다가 울다가 했다.


말씀에 대해 말해보자고 누군가 말했다. 이슬을 튕기는 이파리 사이로 아침 햇볕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말씀 뒤에 의도가 있다고 용기 있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말씀이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춥다고 또 다른 이가 더 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언론이 생겨났다. 그들의 말은 잎을 흔들고 숲을 가로질러 벌판으로 달려가는 바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말의 힘을 알아차렸다. 하늘의 말씀과 땅의 삶에 대한 말을 나누며, 사람들은 생솔가지를 꺾어 불을 붙였다. 말씀으로 치장한 궁전을 향해 그들은 초록 악어처럼 진격했다.

 

수천 년의 문명을 한 호흡에 추상하여 그 족보를 설명하자면, 언론의 뿌리는 정치와 문학에 걸쳐 있다. 삶에 대해 말할 때 언론은 문학에 가깝다. 권력에 대해 말할 때 언론은 정치를 향한다. 삶을 말하려는 기자도 있고 권력을 말하려는 기자도 있다. 삶을 쓰는 기자는 가끔 문학을 썼고 권력을 쓰는 기자는 종종 권력자가 됐다.

 

19세기의 언론은 정치에 가깝고 문학과 멀었다. 신문은 소수 명망가가 발행하는 정치 선전물이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뉴욕 데일리>의 런던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시기도 이와 겹친다. 그의 기사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매우 어렵다.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다. 그 시절 언론의 언어는 엘리트적이었다. 여러 사람이 두루 읽을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필부들은 신문 말고 소설을 읽었다. 19세기 대중의 미디어는 소설이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 등이 그 대표 격이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등을 썼다.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썼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빈곤의 실상을 알리고 사회 모순을 고발 또는 풍자했다.

 

그런데 이들은 기자였다. 찰스 디킨스는 의회 담당 기자였다. 마크 트웨인은 지역 신문에서 수습기자부터 칼럼니스트까지 두루 경험했다. 그들은 엘리트의 미디어인 신문에 칼럼을 쓰고, 대중의 미디어인 소설에 현실을 기록했다. 1830년대 페니신문(Penny Paper)이 미국에 등장한 뒤에야 언론은 대중을 향했다. 1페니만 내면 누구나 신문을 보는 시대가 열렸다. 기자들은 정치인의 후원 대신 대중의 푼돈을 모아 신문을 발행했다. 가난하고 무지한 노동자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간명하게’(Clear and Concise) 기사 쓰는 일이 확산됐다. ‘스트레이트’ 기사의 시초다. 가난한 이들의 미디어가 된 신문은 정치 대신 삶을 보도했다. 평론과 주장을 밀어내고,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객관성’의 시대, ‘르포르타주’ 전성시대

 

20세기 초반, 대중 신문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흥미 위주의 사건·사고 보도, 권력 고발을 빙자한 추정 보도 등 선정보도(Yellow Journalism)를 성찰했다. ‘객관성’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 언론의 객관성은 이쪽저쪽 의견을 하나씩 반영하는 수준으로 곧잘 격하된다. 그 본래 의미는 충분한 근거를 확보해 보도하자는 데 있다. 이것은 결정적 차이다.

 

객관성의 흐름을 타고 ‘르포르타주’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분명한 근거를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보고 듣는 것이었다.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등의 빈곤 르포는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쓰였다. 흔히 소설가로 알려진 그들 역시 원래는 기자 또는 칼럼니스트였다.

 

오늘날까지도 세계 3대 르포르타주로 불리는 <세계를 뒤흔든 10일>(존 리드), <카탈루니아 찬가>(조지 오웰>, <중국의 붉은 별>(에드거 스노)도 20세기 초·중반에 탄생했다. 객관성의 허울만 부여잡은 한국 기자들의 취재 현장은 브리핑룸에 갇혀 있지만, 그 시절 서구의 기자들은 전쟁과 혁명의 공간으로 달려갔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옮기는 데 열을 올렸다.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인 전쟁과 혁명에 대한 그들의 글에서 문학과 언론은 경계를 허물었다.

 

언론의 주류 언어가 평론에서 사건 보도로, 다시 르포르타주로 옮겨가는 동안, 디킨스와 트웨인의 후예들은 새 경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존 스타인벡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 모두 기자였다. 현장을 취재해 르포르타주를 신문에 내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프리랜서 기자였던 스타인벡은 <샌프란시스코 뉴스>에 캘리포니아 이주 농민들에 대한 르포 기사를 연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 빈농의 참혹한 실상을 다룬 소설 <분노의 포도>를 썼다. 역시 프리랜서 기자로 활약했던 헤밍웨이는 북미신문협회(NANA)와 계약을 맺고 스페인 내전을 취재해 기사를 송고했다. 나중엔 이를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이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실은 그게 소설을 쓰는 이유이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명성에 대한 개인의 야심에 기초한 것이라 할지라도 스타인벡과 헤밍웨이는 더 많은 대중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학은 여전히 대중의 미디어였다.

기자가 문학의 영역을 넘보자, 소설가는 언론의 영역을 침범했다. 취재한 사실을 기사에만 쓰고 더 풍부한 이야기는 소설로 옮겨 담는 ‘이중의 글쓰기’가 굳이 필요할까. 그냥 사실 그 자체로 가득한 소설을 쓰면 되지 않을까. 미국 소설가 트루먼 커포티는 야심을 품었다.

 

 

 

경계비이자 기념비 <냉혈>

 

1959년 11월 미국 캔자스시티의 작은 마을에서 일가족 4명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커포티는 이 사건에 대한 단신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꼈다. 이후 6년여 동안 피해자·살인자·목격자·수사관 등 수백 명을 직접 인터뷰해 주간지 <뉴요커>에 사건 기사를 연재했고, 1966년 단행본 <냉혈>(In Cold Blood)을 펴냈다.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이 글은 무엇인가? 소설인가? 기사인가?

 

기대만큼 재미있진 않다는 ‘개인적 리뷰’를 전제하고 말하자면, 커포티의 <냉혈>은 경계비이자 기념비다.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이자 뉴저널리즘의 표상이며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원천이다.

 

문학계에서는 이를 소설이라 불렀다. <냉혈>은 ‘논픽션 소설’, 즉 사실을 옮긴 소설의 효시로 평가된다. 커포티 자신도 소설로 여겼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을 해냈다. 오직 사실로만 이뤄진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언론계에선 이를 기사로 보았다. 미국의 기자 톰 울프는 <냉혈>을 극찬하면서 “이제 문학은 저널리즘에서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뉴저널리즘’이라는 말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973년 <뉴저널리즘>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톰 울프를 비롯해 헌터 톰슨, 게이 탈레시 등 ‘실명으로 이뤄진 이야기’를 추구했던 당대 기자들의 기사가 담겨 있다.

 

소설가의 논픽션을 기자들이 열렬히 반긴 이유가 있다. 1960~70년대에 언론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팽배했다. 베트남 전쟁 등의 진실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다는 성찰이 일었다. 언론의 자양분인 대중이 언론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진실을 어떻게 드러내야 다시 대중과 만날 것인가. 그 고민에 대한 답이 뉴저널리즘이었다. 그것은 사실주의 문학과 르포르타주의 혼융이었다. 문학의 방식으로, 대신 허구가 아닌 사실을 토대로, 생생하게 현실을 보도하자는 기치였다.

 

당시 뉴저널리스트들은 특정 사건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써낼 분량으로’ 기사를 썼다. 그래야 사건의 전모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진앙지이자 둥지는 <뉴요커> 등 주간지였다. 이 시기는 매거진의 전성기와 겹친다. (‘매거진’을 잡지로 번역한 것은 참 잡스러운 일이다. 그 어원인 아랍어 ‘makhzin’은 ‘저장소·창고’라는 뜻이고, 특히 여러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둔 장소를 말한다. <한겨레21>이 왜 ‘잡스러운 종이’(잡지)겠는가. 이 매체는 지식과 정보와 영감의 보고다.)

 

 

 

뉴저널리즘-탐사보도-내러티브 저널리즘

 

뉴저널리즘은 주로 프리랜서 작가들의 무기가 됐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귄터 발라프), <안나와디의 아이들>(캐서린 부) 등 국내에 번역된 대부분의 빈곤 르포는 특정 뉴스룸에 긴박되지 않은 이들의 성취다. 기자들의 스트레이트는 하루 만에 자취 없이 사라져도, 그들의 뉴저널리즘은 수십 년 뒤까지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매거진이 구현해낸 뉴저널리즘은 미국 언론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 미국 기자들이 봉착한 문제는 분명한 근거에 기초한 사실 보도 및 그 사실의 맥락과 의미를 전달하는 진실 보도의 방법이었다. 그 화두 앞에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일간지들은 뉴저널리즘이 아닌 탐사저널리즘에 몰두하고 있었다.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는 당국의 수사 발표에 기대지 않고 기자들이 직접 수사해 증거를 수집하고 제대로 고발하자는 ‘수사’ 취재 기법이다. 그 절정은 1972년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보도다. 그들은 검사의 눈높이로 권력의 범죄 사실을 취재했다. 한동안 미국의 주류 언론은 수사 보도에 열광했다.

 

그들이 문학에 눈을 돌린 것은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이후 탐사보도는 각종 통계분석을 기초로 하는 사회과학방법론을 받아들여, 조사보도 또는 정밀보도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올해 초,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세계 조세회피처 폭로 보도가 대표적이다. ICIJ는 다양한 데이터 분석 기법을 활용해 방대한 자료를 뒤졌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그 엄밀성과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읽지 않았다.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미국 주류 언론은 그제야 ‘언어 전략’을 새로 고민했다. 숫자가 주장보다 강력할 수는 있지만, 이야기보다 매력적이진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들은 과거 뉴저널리즘의 기치를 다시 들춰보았다.

 

이를 탐사보도에 적용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이 1990년대 후반 태동했다. 그 중심지는 미국 하버드대학 니먼재단이다. 2001년부터 매년 미국 전역의 기자와 학자를 모아 ‘내러티브 저널리즘 콘퍼런스’를 열고 있다.

 

내러티브의 동사형은 ‘narrate’(이야기하다)이고 그 어원은 그리스어 ‘알다’라는 뜻의 ‘gnarus’다. 어원으로 보자면 ‘know’의 사촌이다. 내러티브는 그저 이야기를 말하는(Story Telling)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이야기해준다는 뜻이다.

뉴저널리즘의 현대적 복권인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책으로 2005년 출간된 <뉴뉴저널리즘>이 있다(<뉴저널리즘>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번역 출간되진 않았다).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적용한 최근의 여러 기사를 편집했다.

 

톰 울프의 <뉴저널리즘>에 대한 오마주인 셈인데, 저자는 ‘뉴저널리즘’과 ‘뉴뉴저널리즘’의 차이에 대해 “기발한 기삿거리를 찾기보다는 권력 고발의 전통과 소외된 자들의 평범한 연대기에 더 다가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빈곤의 현실에 주목했던 사실주의 문학, 문학의 기법을 기사에 적용한 뉴저널리즘, 그리고 권력을 수사고발하려는 탐사보도의 ‘삼위일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2009년 가을, <한겨레21>은 물경 2세기에 걸친 그 역사를 한국에서 재현해보려 했다. (염치 불구하고 소개하자면) 당시 연재를 시작한 ‘노동 OTL’은 잠입 현장 취재에 기초한 빈곤 르포이자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시도였다.

 

 

 

전업 기자를 위협해달라

 

그리고 ‘손바닥문학상’은 그런 시도가 더 많은 이들에게 퍼지고 번지길 의도하는 봉화였다. 특히 문학과 언론의 경계에서 현실을 고발하려는 (잠재적 또는 미래의) 프리랜서 기자들에게 보내는 작은 초대장이었다. 저 높은 곳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부의 관심사는 살고 죽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데 있으므로,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제안이었다.

 

미국 언론이 쉼없이 성찰하고 진화한 것은 전업 기자의 혁신 이전에 그 외곽의 프리랜서들 덕분이다. 그들은 때로 르포르타주, 때로 소설을 통해 정치 중심의 단발 보도에 안주하려는 전업 기자들을 계속 위협했다. 대중은 언제나 이야기를 사랑했으므로, 기자의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프리랜서의 르포와 소설에 더 열광했다.

 

그래서 우리는 귀기울이며 기다린다. 사슴의 눈으로 화톳불 앞에 앉아 사는 일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당신. 그대의 영토는 아직 땅에 있고 숲에 깃들어 있지만, 문학의 눈으로 일상을 헤집어 언론의 방식으로 사실을 드러내는 작은 글을 당신은 쓸 수 있다. 그런 글이 모이면 우리 마침내 악어 떼가 되어 정치를 향해 진격할 것이다.  

 

안수찬 <한겨레> 기자 ahn@hani.co.kr

 


'카탈루니아 찬가' -조갑제 칼럼-

스페인 內戰(내전)을 다룬 유명한 소설과 實錄(실록)이 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쓴 넌 픽션 ‘카탈루니아 讚歌(찬가)’가 그것이다. 관점은 다르다. 헤밍웨이는 좌파에 동정적이고, 오웰은 좌파 편에서 싸웠지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헤게모니를 잡은 親蘇派(친소파)를 파쇼와 같은 집단이라고 비판한다. 역사적 관점에선 오웰의 知性이 헤밍웨이의 낭만주의를 압도한다.
 
  ‘카탈루니아 찬가’의 무대는 이 지방의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이다. 이 도시를 여행할 때 이 책을 갖고 다니면서 읽으면 80년 전의 역사적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람블라스 거리는 바르셀로나 한 가운데에 난 번화가이다.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곳이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빈다. 이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하여 벌어졌던 ‘內戰 속의 內戰’이 ‘카탈루니아 찬가’의 主題(주제)이다.
 
  오웰은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두 편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때문에 反共(반공)자유민주주의자로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이 좌파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內戰으로 치닫자 오웰은 바르셀로나로 가서 좌파 민병대에 자원, 입대한다.
 
  ‘카탈루니아 찬가’의 도입부는 노동자 계급이 정권을 잡은 바르셀로나의 활기찬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당은 파괴되고, 팁은 없어지고, 상류층의 사치스런 옷차림은 사라지고, 하층민들은 당당해졌다. 오웰은 프랑코 군대와 대치한 戰線(전선)에 투입되어 지루한 참호전을 하게 된다. 敵(적)과의 實戰(실전)보다는 이와 쥐를 상대로 한 싸움이 더 처절하다. 그는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나왔다가 ‘內戰 중의 內戰’에 휘말린다. 바르셀로나의 좌파정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세력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웰은 자신의 계보와 신념에 따라 反蘇 사회주의 진영에 서게 된다. 親蘇派(친소파)가 시가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오웰은 전선에 복귀한다. 여기서 목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除隊(제대)와 출국을 꾀하게 되는데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反蘇분자’로 지목되어 언제 끌려가 총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스페인에 동행하였던 부인은 호텔에 연금되고, 오웰은 露宿(노숙)을 해가면서 거리를 방황한다.
 
  경찰은 밤에만 설치고 낮은 자유롭다. 오웰이 안전한 낮 시간에 여기저기 들르는 카페와 음식점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관광 가이드이다. 목숨이 오고 가는 살벌한 분위기이지만 독일이나 소련과는 다르다. 오웰은 스페인 사람들은 절대로 파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긴장된 가운데서도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오웰은 ‘스페인에 대하여는 나쁜 기억이 많지만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없다’고 말한다.
 
  親蘇派 형사들이 오웰의 부인이 묵던 호텔 방을 급습, 두 시간 동안 수색을 하는데 부인이 누워 있는 침대는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은 이 침대 밑에 불온문서와 무기가 숨겨져 있는데도 그들은 남자의 명예심을 지킨다.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오웰은 親蘇派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노동자 계급을 탄압함으로써 계급해방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배신하였다고 개탄한다. 바르셀로나에서 親蘇派가 정권을 독점한 뒤엔 노동자들이 다시 탄압을 받고 자본가들이 回生한다. 형사들은 노동자풍의 사람들을 검문하여 잡아들이고 부유층 같아 보이는 이들은 검문도 하지 않는다.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얻은 교훈은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똑같은 巨惡(거악)이란 깨달음이었다.
 
  ‘카탈루니아 찬가’를 읽는 독자들은 오웰 부부가 기차 편으로 스페인을 벗어나 프랑스로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시가전, 암살, 투옥, 처형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스페인을 떠나 7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걱정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깊게 잠들어 있는 영국을 보면서 두려워지는 것은,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자리에서 튀어나오기 전엔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오웰의 이런 예감은 곧 적중하였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히틀러와 손잡고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배신하고 독일이 전쟁으로 달려가는 길을 열어준다. 9월 독일이 폴란드로 쳐들어가자 영국은 비로소 평화지상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1938년에 출판된 ‘카탈루니아 찬가’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담 출판사가 스탈린 비판 내용 때문에 출판을 거부, 다른 회사를 찾아서 낸 책인데, 1951년 再版(재판)이 나올 때까지 초판 1500부가 다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1950년 47세로 죽었는데, 그때까지 번역판은 이탈리아어뿐이었다. 오웰은 죽기 직전까지 초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신경을 썼다.
 
  그 뒤 바르셀로나도 많이 바뀌었다. 프랑코 시절에 핍박을 많이 받았던 카탈루니아 사람들은 2002년 월드 컵 8강전에서 스페인 팀이 승부차기로 한국 팀에 지자 환호했다. 지난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 팀이 우승하자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처음으로 ‘스페인 만세’와 ‘카탈루니아 만세’를 같이 외쳤다.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의 主力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이 떠오른다. 6·25 남침을 前後(전후)하여 박헌영의 남로당이 김일성에게 배신당하고 숙청당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남로당 후손들 중에서 오웰 같은 양심가가 나와서 김일성주의를 비판하는 名作(명작)을 남길 때도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