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은 터키 보스포루스해협의 남쪽 입구에 위치, 면적은 1830.92㎢로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골든혼(Golden Horn)·마르마라해(海)에 의하여 베욜루·이스탄불(파티프)·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대와는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고고학박물관·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식품가공·농기구·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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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7세기 중엽 그리스인(人)의 식민도시로 창건되어 비잔티움이라 불리었다. 당시의 시가는 현재의 이스탄불 지구의 동쪽 모퉁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의 돌출부 지구에 있었다. BC 512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었으나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그리스의 도시동맹에 가입하였고, 이어서 로마의 대두로 그 속주(屬州)가 되었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성벽을 확대하고 시내를 정비하여 330년에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이라고 하였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395)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성벽은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476), 동방정교회 세계의 가장 중요한 기지, 비잔틴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였고, 동서 문화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1204년에 제4회 십자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261년에 미카엘 8세가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도시는 약탈당하여 황폐화하였다. 오스만제국은 14세기 중엽부터 발칸에 진출하여 콘스탄티노플의 포위 태세를 갖추었으나 앙카라 싸움에서 티무르군(軍)에게 패하여(1402), 이 계획은 한때 좌절되었다. 그러나 제국이 부흥하자 술탄 메메드 2세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여러 교회를 이슬람 사원으로 개축하였다.
이 결과,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동로마의 학자·문인들은 이탈리아로 피해갔으며, 서유럽에 르네상스의 꽃을 피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후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고, 이슬람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의 최대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1520∼1566) 때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제국의 쇠퇴를 면하기 위하여 각 분야에서 서구화가 추진되면서 이스탄불도 점차 서구적인 도시로 변해갔다. 19세기 후반 이후 이스탄불은 발칸 문제를 둘러싼 열강의 분쟁지가 되어 자주 전화(戰禍)를 입었으며,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쪽에 참전하여 패배하자 1918년 11월~1923년 10월까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가 지도하는 혁명이 성공하여 1923년 10월에 터키공화국이 성립되자 수도는 아나톨리아의 앙카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스탄불은 1600년에 이르는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경제적·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터키의 중심지로서 번영하고 있다. 198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톱카프 궁전(오스만 터키어: طوپقپو سرايى, 터키어: 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이스탄불에 있는 모스크. 〈블루 모스크〉는 영어 통칭으로, 정확하게는 〈아흐메트 1세의 모스크〉. 모스크 내벽을 장식하는 장식 타일의 기조가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시난 다음 가는 훌륭한 건축가로서 알려진 궁정건축가 세데흐칼 메흐메트 아가에 의해서 건조되었다. 1609년 착공해서 17년에 완성. 오스만 투르크의 고전기 건축을 대표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고대 경기장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그 장대한 돔과 미너렛을 바라볼 수가 있다. 모스크는 아흐메트 1세의 묘, 마드라사, 무료급식소, 구호소와 함께 오스만 투르크시대의 독특한 왕립시설 퀄리에(kulliye)를 구성하며 규모도 전체의 구성도 시난에 의해서 세워진 세흐자데 쟈미(이스탄불, 1543~48)를 기준으로 하고, 균형을 이룬 구성을 취하는 규모가 장대한 중앙회당식의 예배당과 넓은 중정으로 되어 있다. 직경 23.5m에 이른 큰 돔은 4개의 거대한 대리석제의 원주로 지지되어서 광대한 공간을 창출하고, 다수 회중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대 돔의 사방에는 반돔을 두었다. 내벽은 2만1000장을 넘는 청, 록, 흑, 홍 등의 화려한 이즈니크산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꽃나무나 과일을 표현한 갤러리의 타일이 가장 아름답다. 예배당의 네 구석과 중정 양 구석에 설치된 오스만 제국 건축의 독특한 가늘고 앞이 뾰족한 6기의 미너렛은 메카의 성 모스크의 7기의 미너렛 다음가는 훌륭한 것이다. 넓은 중정에는 소규모이지만 목욕용 우물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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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32m이며, 거칠게 깎은 벽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려 세운 것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4세기 경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869년에 지진으로 꼭대기가 일부 무너진 뒤 콘스탄티누스 7세(Constantine VII, 908-945 재위)가 보수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의 조부인 바실 1세(Basil I, 867-886)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황금빛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동 장식은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인 1204년에 유실되었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의 신전이나 능묘에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기둥 면에는 국왕의 공적을 상형 문자로 적은 글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 길이는 18∼30m이다.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들이 숭배한 태양신 라(Ra)에게 바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벨리스크는 본래 신전 앞에 쌍으로 세워졌는데,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대부분이 열강제국에게 약탈당했다.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 1개, 영국 런던에 1개, 미국에 1개, 터키 이스탄불에도 1개가 있으며 이탈리아 로마에는 무려 13개가 있다. 이중 미국과 영국에 있는 투트모세 3세의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라 불린다.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태양신 신앙과 관계가 있고, 고왕국(古王國)시대에 아브시르에 있는 제5왕조의 네우세르라 왕묘의 태양피라미드 신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묘의 기념비로 건립되었다. 중(中)왕국시대 이후로는, 국왕의 통치 기념제 때에 신전탑문 앞에 한쌍이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라는 뜻)에 있는, 제12왕조의 세누세르 1세가 건립한 것으로 높이 20.7 m이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 이후로 제왕(諸王)이 명문(銘文)을 4면에 새긴, 애스원의 화강석제의 오벨리스크를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앞에 세웠는데 대부분 유럽에 반출되어, 현재는 투트모세 1세(23.2 m, 143 t)와 하트솁수트 여왕(29.6 m, 325 t)의 것이 하나씩 남아 있을 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투트모세 3세의 것은 19세기에 워싱턴 D.C.과 런던으로 각각 가져갔다. 아스완의 채석장에는 길이 41.7 m의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하나 있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4각주. 끝이 가늘고 피라미드형을 한 정상에 황금을 붙였으며 본체와 기대(基台) 표면에 봉헌의 명문(銘文)을 새겼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신전의 성석(聖石) 벤벤을 모방한 것. 제5왕조(B.C. 2494경~B.C. 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神體)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경(B.C. 1919경 이후)부터 신전내에, 신왕국시대(B.C. 1567경~B.C. 1085경)에는 필론 앞에 한쌍씩 세웠다. 대부분은 애스원산(産)의 화강암제. 후에 아시리아왕과 로마황제에 의하여 반출되어 현재 이집트 국내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이중 최대의 것은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이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및 뉴욕 등의 광장과 공원에도 이집트로부터 반출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 세력이 일찍부터 미친 시리아, 팔레스티나에는 이집트신들에 대한 신앙으로 중기 청동기시대에 세운 비블로스의 태양 신전에 높이 80~150cm의 소형 오벨리스크가 다수 봉납되어 오벨리스크 신전이라는 이름이 있다. 같은 형의 소형 오벨리스크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서도 발견되어 동(東) 지중해 연안지방(레반트)에 대한 이집트 문화의 보급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마니슈투스의 오벨리스크』(수사 출토, 루브르 박물관), 아슈르바니파(?)의 『백작 오벨리스크』(니네베 출토, 대영박물관), 샤르마네얄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니므루드 출토, 대영박물관)라 통칭되는 4각주 석비는 국왕의 업적, 전쟁, 숭배 및 공납 등의 명문과 부조를 한 말하자면 기념비인데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의 카파르 차르쉬는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으로 이스탄불을 장악하고 동서 교역으로 얻은 터키의 부를 상징한다. 1455부터 1461년에 걸쳐 이스탄불은 도시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아케이드를 마련하고 더욱 활발한 상업 활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점차 시장의 규모가 커졌고 지금의 카파르 차르쉬로 발전되었다. 현재 관광객들에게 ‘그랜드 바자르’로 익숙한 카파르 차르쉬에서는 터키의 모든 생산품의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규모가 엄청나다.
이곳은 점포의 수가 무려 4,400여 개에 달하고, 입구가 총 18군데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자르 중 하나다. 큰 규모 때문에 길을 찾기가 어렵다면 동쪽으로 나 있는 누로스마니예 문이나 서쪽으로 나 있는 베야짓 문을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다. 카파르 차르쉬는 재래시장과 같이 여전히 가격 흥정을 하기도 하지만 신용카드 사용이 자유로운 편리함도 갖추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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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는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이며,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과의 경계를 이룬다. 고대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인 데다가 마르마라해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1453년 이래 터키가 장악하게 되자 방위를 목적으로 양안(兩岸)을 요새화(要塞化)하였다.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航行權)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지형적으로는 일종의 익곡(溺谷)으로 양안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1973년에 완성된 해협 횡단의 유라시아 대교(大橋:일명 보스포루스교)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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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골든혼(Golden Horn)에 걸쳐진 역사적인 다리이다. 여러 차례 재건되었는데, 현재의 다리는 1994년에 완공된 것이다.
도개교(跳開橋)로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간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혼(Golden Horn)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 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Galata)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Eminönü)를 잇는 현재 자리에 다리를 놓고자 처음 시도한 것은 술탄 베야지트 2세(Bayezid II, 1481-1512 재위) 재위기인 1502년이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했다. 1845년에 술탄 압둘마지드(Abdulmecid, 1839-1861재위)의 어머니 발리데(Valide) 왕비의 명령으로 최초의 다리가 놓였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술탄 압둘아지즈(Abdulaziz, 1861-1876 재위)가 다리를 재건했고, 1870년에 프랑스 회사에 의해 확장 공사가 시작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다리의 길이는 480m, 폭은 14m가 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갈라타 다리(Old Galata Bridge)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재의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놓은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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