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멋집n요리

쓰린 속 달래주는 늙은 아내 같은 음식, 해장국

힉스_길메들 2011. 12. 30. 22:52

서울 인근 해장국 3미(三味)
또 연말이다. 이래저래 술자리가 많은 계절, 피할 수 없는 술자리 몇 군데 돌고나면 우리 몸은 피로에 지치게 마련. 고려 때의 문장가이자 소문난 술꾼이었던 이규보는 늘 하인에게 빈 독과 삽을 들고 자신을 따르게 했다. 술을 먹다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독에 담아 그 자리에 묻어달라는 뜻이다. 목숨 걸고 마셔대는 주당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모양이다.

과음을 하면 신체 모든 기관은 비상체제에 돌입하고 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미 마신 술이야 어쩔 수 없지만 몸에 들어간 술이 부리는 난동을 최소화시키고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몸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먹는 음식이 바로 해장국이다. 쓰린 속은 물론이고 다친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서울 인근의 세 가지 해장국 맛을 찾아보았다.

해장국의 원조, 북어국
중구 다동 '무교동북어국집'


바다와 다소 떨어진 추운 고지대에서 오랫동안 말리는 황태에 비해, 북어는 속초나 묵호 해안가에서 짧은 기간 바닷바람에 말린다. 눈을 맞고 심한 기온 차를 견디면서 살이 포실포실해지는 황태에 비해 북어는 단단하다. 북어는 몸 안에 쌓인 공해물질이나 독성을 풀어줄 뿐 아니라 술독을 푸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또한 ‘메티오닌’을 비롯한 아미노산이 풍부하여 간 기능을 향상시킨다. 그래서 북어는 일찌감치 해장국의 단골 소재로 사랑받아왔다. 

창업자 진인범(76)씨가 ‘터줏골02-777-3891’이라는 이름으로 1968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북어국을 팔아온 '무교동북어국집'은 현재 아들인 광진 ․ 광삼 형제가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집 메뉴는 오로지 ‘북어해장국(6500원)’ 단 한 가지다.

이 집은 해마다 강원도 고성에서 말린 통북어를 1년 단위로 계약해서 들여온다. 말리는 과정에서 북어의 맛과 질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북어국을 조리하는 것 이상으로 건조 과정부터 주인장이 세밀하게 살핀다. 비린내가 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햇볕을 쪼여야 하고, 씁쓸한 맛이 나지 않도록 뱃속의 내장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며, 육질이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야 비로소 북어국 재료로 낙점을 받는다.

구입한 통북어는 옛날 방식대로 방망이로 두들긴 다음, 대가리를 떼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작두로 적당하게 잘라서 사용한다. 이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가끔 ‘쿵쿵’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바로 위층에서 방망이로 북어 몸통을 두드리는 소리다.

북어국은 뭉근한 불에 오래 끓여야 제 맛이 나, 연탄불이 최선의 열원이지만 주변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지금은 가스불로 끓이고 있다. 따라서 가스의 화력조절과 타이밍 조절이 아주 중요하다. 북어국 국물은 사골국물에 무, 멥쌀가루, 북어 뼈, 북어 대가리를 넣고 오래 끓인다. 이렇게 끓인 국물을 급랭시킨 뒤 12시간 정도 숙성시켜서 여기에 북어 살과 계란, 두부, 파, 마늘, 소금을 넣고 끓인 것을 손님에게 내간다.

명태가 원래 기름기가 없는 생선인데다 멥쌀가루가 기름기를 잡아주기 때문에 기름진 고기 안주를 먹은 뒤에 북어국을 먹으면 더욱 뱃속이 편안해진다. 주인장 진광삼 씨에 따르면 처음 먹는 사람들은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다가 서너 번 먹어봐야 제대로 북어국 맛을 알게 된다고. 그러나 북어 특유의 구수한 감칠맛과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 맛은 처음 먹어봐도 바로 느낄 수 있다. 북어국은 맵거나 짜지 않고 뱃속에서 자극적이지 않아 여러 장기들과 화합하고 쉽게 소화된다.

진씨 형제는 북어국의 맛과 조리방식 뿐 아니라 후한 인심까지도 아버지 대의 전통을 이으려 노력한다. ‘내 집에 들어온 사람, 배고파서 나가면 안 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40년이 넘도록 국물과 밥은 얼마든지 무한 리필을 해주고 있다.

술독과 공해에 찌든 현대인의 해장국, 짱뚱어탕
강남구 논현동 '삼호짱뚱이'02-547-1416

'삼호짱뚱이'의 ‘짱뚱이탕(1만원)’은 원래 목포 영암 등 남도 해안가 지방의 향토음식이었다. 지금은 귀한 음식이지만 그 개체수가 무수히 많았던 예전에는 짱뚱어를 음식의 식재료로 사용하는 예가 무척 드물었다. 워낙 잡기가 힘든데다가 다른 생선에 비해 식재료로서의 매력이 적었다. 그러나 남도 해안가의 몇 안 되는 식당에서 짱뚱어탕을 먹어본 사람들에 의해 그 진가가 알려지면서 차츰 짱뚱이탕의 수요과 함께 취급하는 식당도 늘어났다.

선지, 북어, 콩나물에 비하면 짱뚱어는 해장국 소재로서 다소 엉뚱해 보인다. 그러나 예전에 민간에서는 배가 아플 때 짱뚱어를 고아 삼베 보자기에 걸러서 먹었다고 한다. 짱뚱어는 육지에서 떠내려 온 유기물질이 풍부한 갯벌에서 조류를 제외한 최상위 포식자다. 폐어처럼 폐로도 호흡하는 살아있는 화석이자 고대부터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물고기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혹독했던 지질시대를 견뎌낸 강인한 어종이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환경오염에는 그 어떤 종보다 취약하다. 조금만 갯벌이 오염되어도 살 수 없어 짱뚱어는 환경오염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공해가 심한 현대인들의 보양식과 해장국 소재로 손색이 없다.

짱뚱이탕은 짱뚱어를 곱게 갈아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끓인다. 얼핏 보기에 추어탕과 비슷하다. 그러나 짱뚱어가 자연산이라는 점, 흙냄새나 비린내가 원천적으로 나지 않는다는 점, 산초를 넣고 먹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약간 쌉쌀한 맛이 도는 듯 하면서 구수하고 시원하다. 주인장 김명훈(53)씨에 따르면 기본적인 재료만 넣어 멋 부리지 않고 만든 가장 시골스런 음식이라고 한다.

한편, 이 집에는 짱뚱어탕과 함께 오래 전부터 매생이탕(1만원)이 해장국으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매생이탕은 매생이의 섬유질과 미네랄, 굴에 들어있는 양질의 단백질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알코올과 지방 때문에 둔화된 대장운동을 촉진시켜주고 숙취를 제거해준다.

이 집에서는 참기름을 넣고 매생이를 볶은 후에 다시마 육수를 넣은 다음, 액젓과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하고 생굴을 넣어 한소끔 끓여서 내온다. 매생이 양이 푸짐하고 향도 좋다.

매생이는 바닷물이 차가워지면 제 몸에 맛과 향을 가두기 때문에 요즘 같은 한겨울에 제 맛을 낸다. 완도 고금도 등지에서 수집한 매생이를 사용한다는데, 마침 주인장과 인터뷰 도중 올 들어 처음 현지에서 보낸 매생이가 도착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술 마시기 전에는 짱뚱어탕이, 술 마신 후에는 매생이탕이 해장 효과가 좋다’고 주인장 김씨가 귀띔해주었다.

직장인 선호도 1위의 해장국, 콩나물국밥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전주현대옥'031-703-0067

직장인을 대상으로 해장국 선호도 조사를 하면 늘 수위를 차지하는 음식이 콩나물국밥이다. 그러나 전주를 제외하고는 맛있는 콩나물국밥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 전주 3대 콩나물국밥 중 한 곳인 '전주현대옥'이 경기 분당에 직영점을 열었다.

우리나라 식문화에 해박한 어느 지인은 전주콩나물국밥을 서울 설렁탕, 경상도 돼지국밥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3대 국밥이라고 한다. 지역 대표성이나 대중 호응도로 보아 충분히 타당성 있는 주장이다.

'전주현대옥'의 콩나물국밥은 처음부터 해장용으로 개발된 음식이다. 최초 창업자 양옥련 할머니가 과음하는 남편을 위해 이런 저런 해장 음식을 만든 끝에 할아버지로부터 극찬을 받은 해장 음식이 바로 콩나물해장국이다. 그 뒤 해장국을 끓일 때마다 할아버지가 함께 술 마셨던 친구들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콩나물해장국을 먹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맛있는 콩나물해장국을 집에서만 썩히기 아까우니 식당을 차려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전주현대옥'이 탄생하였다.

이후 양씨가 1979년, 전주 남부시장에 9개뿐인 불편한 좌석을 놓고 콩나물국밥 집을 열었다. 술 마신 남편의 건강과 해장을 위해 집에서 만들었던 그 정성과 손맛대로 만든 콩나물 국밥은 금방 소문이 났고, 전주시민들은 각자 김을 한 봉지씩 사들고 20~30분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국밥을 사먹었다. 남부시장 콩나물국밥은 어느새 전주시민의 소울 푸드가 됐다.

이 집에는 두 가지 스타일의 콩나물국밥이 공존한다. ‘전주남부시장식 콩나물국밥(6,000원)’과 ‘전주끓이는식 콩나물국밥(6,000원)’이다. 남부시장식은 펄펄 끓이지 않고 말아내는 방식이다. 양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끓여주었던 바로 그 국밥인데 국물이 맑아 개운하고 시원한 맛이 특징이다. 끓이는식은 좀 더 화끈한 국밥을 원하는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 뜨거운 국물과 계란을 풀어 걸쭉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얼큰한 맛을 원하면 청양고추를 더 넣는다. 삶아썰은오징어(1000원)를 넣어 먹으면 씹는 맛까지 배가된다.

어느 국밥이나 기본적으로 콩나물, 헛개나무, 여수산 멸치, 표고버섯, 대파, 양파를 넣고 우려낸 국물로 만들기 때문에 숙취 효과가 단연 뛰어나다. 파, 고추, 마늘을 미리 썰어놓지 않고 즉석에서 자르고 썰고 다져서 국밥에 넣어줘 국물 맛이 한결 살아있다.

이 집 국밥에는 깨끗하기로 유명한 ‘ㅎ’ 맥주공장의 지하 천연암반수로 기른 콩나물을 쓴다. 원료인 콩도 다른 식재료들과 마찬가지로 100% 국산이다. 이 집은 전주남부시장터 콩나물국밥 정서와 맛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최근의 웰빙 트렌드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훌륭한 해장국이기도 하지만 다이어트 웰빙 음식으로 전 가족이 먹기에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새벽 5~6시면 일어나 해장술을 마셨던 이규보는 아들 ‘삼백’이가 술을 지나치게 마시자 ‘제 몸 망치는 건 모두 술 탓인데 네 녀석도 술을 좋아하니 이게 대체 웬일이냐(一世誤身全是酒 汝今好飮又何哉)’며 한탄을 했다. 전형적인 ‘바담 풍’ 아버지다. 두주불사의 호주가 아버지를 둔 아들의 피가 어디 가랴.

고려 말에도 성주탕이라는 해장국이 있었던 것 같다. 다 큰 자식에게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들과 함께 개경 저자거리 성주탕 집에 가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긴 자식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야 고려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만 말이다.

글·사진 제공 : 월간외식경영